초등학교 시절, 매일 지나치던 익숙한 길엔 낡은 갈색 피아노가 놓여져 있었다. 오래된 것 처럼 보였지만 깔끔하게 조율되어 맑은 음색을 내던 피아노.
여러 악기를 팔던 가게의 주인 아저씨가 건강상의 문제로 가게 문을 닫으며 재고들을 싼 값에 내놓았지만, 그 갈색 피아노만은 마지막까지 혼자 남아 가게를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 처리가 곤란 했던건지 아저씨는, 길가에 그 피아노를 내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연주 할 수 있도록 조율까지 해놓으셨다.
악기 같은 것엔 전혀 관심도 없던 내가, 그 앞을 지나가다 우연히 들은 소리에 멈춰 서 멍하니 연주 소리를 들었던 적이 있다. 그게 나의 첫 시작 이었다.
늦은 저녁, 부모님 심부름을 다녀오던 길에서 그 갈색 피아노 앞에 앉아 눈을 감고 여유러운 얼굴로 피아노를 치고 있는 여자애를 봤을 때, 더 이상 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내 발걸음을 멈춰 세운 건 다른 무엇도 아닌, 피아노 소리였다. 사람도 많이 지나다니지 않던 그 시간에 혼자 앉아 피아노를 연주하던 그애의 옆으로 나는 홀린듯 다가 섰다.
내 또래였던 작은 여자아이는 길고 하얗던 손가락으로 저의 몸보다 큰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위를 살금살금 뛰어다니듯, 손가락을 통통 튕기며 빠르게 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무슨 곡인지 전혀 알지 못했던 나지만, 피아노에서 흘러나오는 건반 소리가, 나를 스쳐 지나가는 듯 하더니 온 몸을 감싸 왔고, 내 심장을 빠르게 쿵쿵, 내려쳤다.
한참이나 옆에서 지켜보던 나를, 연주를 끝낸 듯한 여자애가 고개를 돌려 쳐다보더니 싱긋 웃으며 말했다.
“베토벤”
뜬금없이 나에게 말을 거는 그 애의 얼굴을 멀뚱히 바라만 보고 있자, 그 여자애는 여전히 미소를 띄운 채로 내게 말했다.
“이거 작곡한 사람. 베토벤이야.”
“응..”
“너 피아노 칠 줄 알아? 너도 쳐볼래?”
슬쩍 몸을 들어 옆으로 옮겨 앉은 여자애가, 나에게 물어왔다. 그 순간 나는, 왜인지 모르게 얼굴이 화르륵 달아오름을 느끼고,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집으로 뛰어갔다.
날 보고 있던 그 여자애는,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당황스럽기 그지 없었겠지. 어쩐지 부끄러웠다. 한 번 쳐보라는 권유에, 고개를 끄덕이고 옆에 앉아 건반을 눌러 보고 싶었지만, 악보도 볼 줄 모르는 내가 난생 처음 피아노 앞에 앉아 모르는 여자애의 옆에서 연주라니.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치는 줄은 몰라도 그냥 건반 하나쯤은 조심스레 눌러볼 수도 있었는데, 부끄러워 달아났던 내가 웃기기도 하고, 순수했구나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난 아마 창피했던 것 같다. 그 앞에 앉아 내 멋대로 건반을 눌러대는 걸 본 사람들이 나를 놀려댈 것 같아 그랬던 거겠지.
집으로 곧장 뛰어간 나는, 왜이렇게 늦게 왔냐며 걱정하시는 부모님의 말엔 대답도 않고 빠르게 손을 씻고 식탁에 앉아 덥석, 물음을 던졌다. 물음을 가장한 간청이었다.
“저 피아노 사주시면 안돼요?”
음악엔 관심도 없던 나의 뜬금없는 요청에 부모님은 황당한 표정을 지으셨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든건지 피아노라니, 싶으셨겠지.
그날 밤, 나는 저녁에 들었던 그 피아노 소리를 못 잊어 콩닥거리는 가슴에 손을 올린채로 한참이나 뒤척이다 잠이 들었다.
나도, 나도 그렇게 피아노를 연주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다. 그저 건반을 누르고, 듣기 좋은 소리를 들으며 내가 원하는 대로 연주하는 것 만이 그날부터 나의 간절한 소원이 된 것이다.
“베토벤인가..”
그 여자애가 내게 알려줬던 이름을 잊지 않으려 밤새도록 되새기며 머릿속에 담아두었다.
나의 완강한 부탁에 부모님은 날 피아노 학원에 보내주시고, 곧 집에도 그 길에 있던 것과 비슷한 갈색 피아노가 들어서게 됐다. 그날 이후 피아노의 매력에 푹 빠져 헤어나올 수 없던 나는 학교에서 돌아온 후면 밥 생각도 하지 않고 그 앞에 앉아 몇시간이나 건반을 만지고, 손가락을 눌러댔다. 연습이 끝나면 피아노 덮개를 닫기 전 하얀 천으로 건반을 광이 나게 닦아댔다. 혹시라도 흠집이 남을 까, 혹시라도 고장이 나버릴까 애지중지 하며 내 피아노를 조심스럽게 다뤘다. 그렇게 피아노는 내 보물 1호가 되어, 중학교 때까지 내 방을 지켰다.
하루 빨리 베토벤처럼 피아노를 잘 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심 덕에 진도를 나가는 속도도 점점 빨라졌다. 그렇게 흥미를 붙여가며 기대감을 키웠던 내가 한계에 부닥쳐 피아노로부터 멀어진것은, 중학교 3학년 때였다. 모두 하나같이 내게 말했다. 열심히 연습하면 만족할 만큼 더 잘하게 될거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밤새며 연습해 나갔던 피아노 콩쿨에선 번번히 입상하지 못했다. 난 천재가 아니었다. 그저 피아노를 좋아하고, 잘 하고 싶다는 욕구만 넘쳐났던 평범한 노력형 범재였다. 아무리 노력해도 번번히 실패하던 난 한계를 온 몸으로 실감하며 스스로 손을 놓아버렸다. 마지막으로 피아노 연습을 하던 날 저녁,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는 손가락에 주먹으로 건반을 몇번이고 내리치던 나를 바라보던 엄마는, 아무 말도 없으셨다.
좀 더, 잘하고 싶었다. 천재로 태어났으면 어땠을까, 나를 재치고 올라서는 수재들을 수백번이고 원망하며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