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는 재미없어.
중3 이후로 난 우리 집의 피아노를 더 이상 거들떠 보지도 않게 되었다. 그렇게 고등학교에 진학해 다른 아이들과 같이 평범하게 공부만 하며 최상위권을 유지하려 애썼던 것 같다. 피아노에 가졌던 만큼의 흥미가 없어 재미있지는 않았지만, 좋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길이었다. 고2 여름. 그렇게 내 안에서 피아노를 완전히 밀어내 버렸을 때, 옆반으로 닝이라는 이름의 여자애가 전학을 왔다. 지나가면서 언뜻 보기에 어디선가 낯익은 얼굴인 듯 싶었지만, 생각이 나지 않아 그냥 스쳐지나가면서 우연히 만났던 거라 생각하고 말았다.
그렇게 아주 지극히 평범한 날들을 보내고 있던 중 어느 하루, 음악실 앞을 지나가던 내 귀에 익숙한 선율이 흘러 들어와 내 발걸음을 멈춰세웠다. 어린 날의 늦은 저녁, 그때 그 상황과 비슷했다. 베토벤 소나타 9번. 날 처음으로 피아노에 흥미를 가지게 했고, 번번히 콩쿨에서 실패해 다 포기하게 만들었던 곡. 누구인지 궁금해 져 문을 열자 피아노 앞에 눈을 감고 앉아 손가락을 튕기던 닝이 보였다. 연주가 끝날 때 까지 옆에 서서 저를 바라만 보던 나에게, 연주가 끝난 닝이 물었다.
“너도 피아노 칠 줄 알아? 쳐볼래?”
옆으로 살짝 비켜앉은 닝에게, 이번엔 똑바로 대답할 수 있었다.
“내는 피아노 안친다.”
“아..그래?”
닝은 머쓱해진듯 시선을 피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말을 걸었다.
“난 닝이야. 2학년 E반.”
“응, 내는 키타 신스케다. 2학년 F반.”
“지나가다가 피아노가 보이길래 그냥 한 번 쳐봤어. 비싼 피아노더라”
“맞나.”
“근데 너는 왜 피아노 안친다는거야? 원래 칠 수 있는 거지?”
닝은 어색한 분위기가 싫었던 건지, 끊임없이 재잘재잘 떠들어 댔다. 매일 같이 말을 걸어오는 닝을 난 아무생각 없이 대하며 그렇게 우리 둘은 급속도로 친해져 어느새 등하교도 같이 하는 사이가 되었고, 난 매일 점심시간마다 닝이 피아노를 치는 걸 구경하러 갔다.
“키타, 나 너 연주하는거 듣고 싶어.”
말 없이 지켜만 보던 나에게, 너는 순수하게 말했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잖아. 매일 나만 치니까...”
진지해진 내 표정에 눈치를 보던 닝은 이내 미안하다고 말하고 빠르게 말을 돌려댔다. 나는 말 없이 닝의 옆자리로 가 앉았다. 그런 나를 빤히 쳐다보던 닝이 웃으며 자리를 살짝 비켜주고, 내 모습을 바라봤다.
오랜만에 눌러보는 건반. 실수는 많이 했지만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싫어해놓고, 어느새 나를 바라보는 닝을 보고 똑같이 웃어보이는 내가 낯설었다. 그 날 이후 점심시간에 피아노를 치는 닝을 지켜보던 내 자리는 멀찍이 떨어진 의자가 아닌, 닝의 바로 옆자리였다. 나란히 앉아 닝과 같이 피아노를 칠 때면 기분이 좋았다. 공부에 치여 받은 스트레스따위는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옆의 닝과 피아노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나, 어렸을 때 말이야. 길에서 피아노를 친 적이 있었어.”
아이스크림을 손에 들고 나와 집으로 걸어가던 닝이 갑자기 어렸을 때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 때, 내 옆에서 보던 남자애가 한 명 있었거든. 내가 피아노 쳐보겠냐고 물어봤는데, 대답도 안하고 그냥 뛰어서 가더라. 그 애가 피아노 치는거 한 번 보고싶었는데. 그 뒤로 못봤어.”
한순간 멍해진 나를 보며 닝이, 아무것도 모르는 듯 웃어보였다.
“걘 지금 피아노를 좋아하고 있을 까?”
웃긴 상황이었다. 그게 닝이었을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는데. 음악실에서 처음 만났을 때 느껴졌던 기시감이 다시 내 몸을 덮었다. 운명같은 말은 믿지 않았던 나는, 단순히 신기한 우연이라 생각했다.
“응, 그럴걸”
운명이라 믿어도 좋았을 텐데. 그렇게 나를 다시 피아노 앞에 앉혀놓았던 닝은, 고3이 되기 전 전학을 가버렸다. 아버지의 해외발령이 이유였다. 웃으며 안녕을 말하고, 언젠가 또 만나자고 약속했지만 갑작스레 떠나버린 닝이 밉기도 했다. 그날 이후부터 나는, 다시 피아노와 멀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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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흥미도 느껴지지 않았다. 잠깐식 앉아보는 날이 있어도, 아무도 없는 옆자리에 난 건반도 눌러보지 않고 금방 일어나 덮개를 덮어버리고는 말았다.
“신스케, 피아노 어떻게 할까?”
타 지역으로 대학을 가는 김에 아예 그 곳으로 가족 전체가 이사를 가기로 결정했다. 나는, 엄마의 말에 갈색 피아노를 뚫어지게 바라보다 시선을 거두고 조용히 말했다.
“그냥, 버려요.”
“괜찮겠니?”
약간은 섭섭하다는 듯 다시 물어오는 엄마에 나는 고개만 살짝 끄덕, 하곤 방으로 들어와 짐을 챙겼다.
다시 만나면, 그때는, 그때도 내가 피아노를 칠 수 있을까. 내가 어떤 마음인지도 알 수 없었다. 이젠 피아노 보다 훨씬 커져버린 내가, 이상하게 낮설었던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