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가를 매일매일 하다가 어느 날부터 주춤하기 시작했다. '매일매일'이라는 말이 내 발목을 잡으며 오히려 나를 괴롭게 했다. 요가가 일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내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쉽고 짧은 요가를 하게 되었다. 보통 내가 하던 요가는 40~60분의 땀이 뻘뻘 나는 것들이었는데, 그걸 다 마치고 나면 하는 '사바아사나'라는 동작이 너무 좋았다. '사바아사나'는 송장자세라고도 한다. 말 그대로 송장처럼 누워 숨을 고르고 휴식을 하는 거다. 죽을 만큼 힘들었던 시간을 보내고 난 뒤의 휴식은 정말 달콤하다. 하지만 이번 요가는 땀 한 방울 나지 않을 정도로 쉬웠다. 매우 짧고 간단해서 송장자세를 안 할 것 같았다. 긴장되는 마지막 순간, 선생님은 입을 뗐다. '마지막 동작은 사바아사나 입니다.' 살짝 놀라웠다. 누워서 휴식하며 어떤 책이 떠올랐다. 카뮈의 '이방인'. 1년 전쯤인가 교양과제 때문에 읽었었다. 처음 읽을 땐 글이 읽히지도 않았고, 두 번째 읽을 때도 역시 끊이지 않는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왜 삶의 끝은 죽음인데도 살아야 할까? 나는 어차피 죽을 것이라면 지금 죽어도 되는 거 아닐까? 내가 살아야 할 이유는 뭘까? 어느 것 하나 답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뿌연 안개 속에 서 있는 기분, 답답하고 막막했다. 지금의 나는 그때보단 어른이 되었나보다. 드디어 나는 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요가 수련은 괴로울지도, 편안할지도 모른다. 그 속에서 고통을 느껴도 즐거움을 느껴도 어찌 됐든 마지막은 송장자세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괴롭고, 고통스러워도, 편안하고 즐거워도 마지막은 죽음이다.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다. 자신의 마지막을 안다는 게 얼마나 큰 위안인가. 삶의 끝이 죽음인 것은 왜 살아야 하는지가 아니라, 살면서 위안을 주는 틀림없는 진실이다. 누구라도 죽는다. 내가 어떻게 살던 결국 죽는다. 끝을 안다는 것이 주는 안정이 있다. 그게 나의 해답이다. 어째서 살아야 하는지 모르던, 태어나버리고 말았던 것을 괴로워하던 스무 살의 이방인에게 이 답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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