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닝, 뭐하고 있나." "어, 왔어?" 우시지마가 나타나 닝을 불렀다. 닝은 조금 당황한 기색을 보였지만 어색하지 않은 척 애써 목소리를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바쁜가." "응? 아니, 별로 바쁘진…." "그럼, 잠깐 따라와라." 우시지마는 언제나와 비슷한 무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익숙해진 것과는 별개로 조금 두려워지기 시작한 닝이 초조한 표정을 가감없이 드러냈다. "왜, 왜? 어디 가는데…." "오면 안다." 우시지마가 다짜고짜 닝의 손목을 끌고 어딘가로 향했다. 우시지마가 향한 곳은 제 4 체육관이었다. 불도 꺼져있는 체육관에 영문을 모른 채 끌려간 닝은 의아한 얼굴로 우시지마를 바라보았다. "열어라." "네가 안 열고…?" "열면 안다." 닝은 오묘한 표정을 유지한 채 시키는대로 문을 젖혔다. 체육관 안에는 불이 켜져 있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체육관 내부는 환하게 보였다. 어둠에 익숙해져 있던 눈이 빛에 적응이 되면서 시야가 돌아오자 닝의 눈에도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 다들, 집 안 갔어?" "봐! 우시지마가 데리러 가야 안 들키고 올 거라 했지!" "이게 무슨…?" "생일 축하해-!" 그제야 닝의 시야에 고 들고 있는 케이크와 촛불이 들어왔다. 닝이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흔들리는 눈을 숨기지 못하고 있는 사이 텐도와 세미가 그런 닝의 팔을 한 쪽씩 잡아서는 케이크가 있는 쪽으로 끌고 갔다. "불어, 불어!" "소원도 잊지 말라구!" "어, 어어?" 닝은 당황스러워 하면서도 제대로 손을 모아 소원을 빌고는 초를 불었는데, 닝이 초를 불자마자 체육관의 불을 키고 돌아온 시라부가 닝이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 사이에 케이크의 초를 뽑아 닝의 얼굴에 던졌다. "라부라부, 너무 과격한 거 아냐?" "괜찮습니다. 이런 날에라도 쳐야죠." "하하! 여전히 싸우고 있는 거야?" "싸운 거 아닙니다. 일방적으로 화가 조금 났을 뿐." 여전히 케이크에 얼굴이 파묻혀 있는 닝을 뒤로한 채 대화를 나누고 있다가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런 닝을 발견한 고 안절부절 못 하는 것을 본 시라부가 그제야 닝이 제 손 끝의 케이크에 파묻혀 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급하게 케이크를 닝의 얼굴에서 털어냈다. "당신은, 바보입니까?" "어… 하하?" "하…. 죽을 뻔 했지 않나요." "응? 아직은 참을만 했어서…." 기껏 얼굴에 묻힌 케이크를 제 소매를 끌어내 닦아낸 시라부가 한숨을 크게 뱉었다. 두 사람의 묘한 기류에 가만히 두 사람을 지켜보던 다른 사람들이 케이크에 남은 생크림을 끌어내 서로의 얼굴에 묻히기 시작했다. "우시지마!" "아, 안됩니다!" 생크림을 손에 잔뜩 묻히고 우시지마에게 달려나가는 텐도를 몸으로 막아선 시라부가 결국 소매 뿐 아니라 온 몸이 생크림 범벅이 될 때가 되어서야 머리에 생크림을 잔뜩 묻힌 야마가타가 나와 선물 교환식을 하자 소리치는 것으로 상황이 종료되었다. "선물도 있어?" "당연하죠!" "자, 다들 챙겨왔지? 1학년부터 까봐!" 1학년의 선물 개봉식을 한 차례 거치고 2학년의 차례가 되었을 때, 모두의 시선이 당연하다는 듯이 시라부에게로 모였는데 시라부의 싸한 분위기를 이겨내지 못한 닝이 결국 선물은 괜찮다며 카와니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 저는…." "준비, 했는데요." "여기… 아, 그럼 너 먼저." "아냐, 너 먼저 해." 시라부의 말을 들은 카와니시가 어색한 행동으로 선물을 건넸다. 선물은 그 자리에서 열어보는 것이 원칙이었기에 닝이 예쁘게 묶인 리본을 풀었다. 이제껏 받은 선물은 운동부 남학생이 준 선물이라는 티가 폴폴나는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예외적이게도 카와니시의 선물은 제법 인기있는 브랜드의 값이 조금 있는 립스틱이었다. "에, 너무 작은 거 아냐?" "이거… 비싸지 않아?" "누나가 할인권이 있다고 해서… 별로 비싸지 않았어요." "그래도…. 할인 사용해도 텐도 선물 네 배 가격 쯤 될 것 같은데." "저기, 나 아직 선물 안 보여줬거든?" 닝이 미안해하는 티를 내자 카와니시는 손을 저어가며 괜찮다는 표현을 해보였다. 잘 쓰겠다며 곱게 포장까지 다시한 닝이 소중하게 선물을 다른 선물들 사이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다시 적막이 이어졌다. "이거, 선물입니다." "아, 고마워." 당연하게도 그 정적을 깬 것은 시라부였다. 닝은 시라부가 건넨 선물의 테이프를 하나씩 천천히 뜯어갔다. 테이프가 뜯기는 동안에도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고, 침 삼키는 소리와 테이프가 떨어지며 포장지의 종이를 조금 뜯어내는 소리만이 체육관에 울렸다. "어, 이건…." "자주 닳는다 들었습니다." "고마워." 휴대폰 케이스였다. 닝과는 제법 어울리는 색이었지만 시라부와는 어울리지 않는 분홍색의 케이스였는데, 제법 마음에 들었는지 닝의 입이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어, 그런데… 두 개네?" "같은 제품입니다. 하나는…." "기종이 다른데?" "…네." "시라부, 이건… 도로 가져 가." 시라부는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굳이 닝이 내민 휴대폰 케이스를 다시 가져가지도 않았다. 닝과 시라부의 묘한 신경전이 잠시 이어지다가 새어나온 고시키의 앓는 소리에 결국 닝이 먼저 고집을 꺾고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들고 있던 팔을 거두었다. "…언니가 안 받으면, 나도 몰라." "감사합니다." 시라부가 허리를 90도까지 꺾어 인사를 하니, 그런 시라부의 모습을 거의 못 봐온 부원들이 일동 경악을 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자, 다음! 내 꺼!" 계속해서 선물 증정식이 이어져 결국 분위기가 누그러들고, 시라부도 제법 만족스러운 미소를 숨기지 않았다. 선물 증정식이 이어진 뒤에 다같이 모인 김에 조금 수다를 떨다가 시간이 늦어져 마무리 하고 다같이 하교를 했다. 닝은 세미와 방향이 같아 시간이 맞을 때면 종종 하교를 하곤 했는데, 짐을 들어주겠다는 이유를 들어가며 닝을 따라붙은 세미와 닝이 함께 하교길을 걷게 되었다. 제 것이니 저가 더 많이 들겠다는 닝의 말을 싸그리 무시하고 저가 준 선물을 제외한 나머지 선물을 전부 안아든 세미가 적어도 반 씩 나눠들자며 저가 두고 온 세미의 선물을 쥐고 세미의 뒤를 쫒아 뛰어오는 닝을 무시한 채로 먼저 걸음을 옮겼다. 결국 항복한 닝이 세미의 선물만을 끌어 안고 달려오자 그제야 만족한 세미가 닝의 보폭에 걸음을 맞춰 나란히 걸음을 옮겼다. "닝, 근데…." "응?" "어… 궁금한 거, 물어봐도 돼?" "응? 응, 물어 봐!" 기분 좋은 김에, 내가 다 대답해준다! 닝이 기운차게 외친 말이 동네를 한 바퀴 돌고 다시 되돌아 왔다. 닝도 크게 퍼져나간 제 목소리가 조금 부끄러운지 입을 틀어막고는 얼굴을 붉혔는데, 그런 닝을 보고 한 차례 웃음을 크게 터트린 세미가 조금 진정을 하고 표정을 굳힌 뒤, 다시 본론을 꺼내 왔다. "그, 시라부랑… 무슨 사이야?" "아… 시라부." "혹시, 시라부가…." "아니, 아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그건 아니야! 시라부는 내가 아니라, 우리 언… 아, 아니…." "언… 언니?" "하… 이거 진짜 내가 말했다고 하지 말고. 그냥, 듣고 잊어. 알겠지?" "응, 알겠어." 닝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는데, 혼자 앓고 있던 이야기를 털어놓을 사람이 생겨서 조금 마음이 편해졌던 것인지 말을 이어갈 수록 점점 표정이 풀어지고 목소리도 고양되어갔다. "시라부가, 우리 사촌 언니를 좋아하는데…." "잠깐, 사촌 언니? 둘 있었던가?" "응, 둘 있는데. 그 중 첫 째 언니. 어렸을 때 같이 살아서 제법 친해. 아무튼 어쩌다가 둘이 얽힌 건지는 몰라도… 어디서 그 언니가 내 사촌 언니인 걸 들었는지 시라부가 계속 나한테 소개시켜달라는 부탁을 하는 거야." "…시라부가?" "뭔가 안 믿기지? 나도 이게 뭔 일인가 싶었다니까…. 암튼, 그랬는데 왠지 배알이 꼴려서 안 해준다고 버텼거든." 닝이 조금 인상을 찌푸리며 뱉은 말을 들은 세미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닝을 바라보았다. 닝은 그런 세미의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 번 씨익 웃어보인 다음 말을 이어갔는데, 세미는 그런 닝이 황당해 웃음이 새어나올 뻔 한 것을 애써 삼켜냈다. "아무튼, 그랬는데 그걸 들킨 거지. 내가 그냥 왠지 짜증나서 소개를 안 시켜주고 있었다는 걸!" "어쩐지… 이해가 가네. 성격 나빠…." "뭐, 내 맘이지. 그렇게 시라부가 화가 났고, 그대로 계속 이어져서 오늘인 거야." "잠깐, 그럼… 아까 그 케이스 하나는…." "언니 걸로 산 거겠지. 기종은 또 어떻게 알았는지…." 세미는 무슨 말을 해야 할 지도 이해하지 못하고 어벙벙한 상태로 혼자 중얼거리는 닝을 잠깐 바라보다가 이내 표정을 풀어내고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말을 이었다. "그럼," "응?" "나는 너, 계속 좋아해도 되는 거네?" 툭- 하고 닝의 손에 들려있던 세미가 준 선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동네에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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