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해가 짧아지고, 서늘한 기운이 마을을 감돌았다. 거래단이 돌아오고 사냥꾼이 사냥을 시작하는 시기였다.
2. 그 학교는 엣적에 수도원이었다. 그러나 수도원으로서 기능한 세월은 17세기 초반에 지어지고 고작 일백 년 정도였다.
3. 요즘 우리 가게에는 특별한 손님이 생겼다. 고작해야 내 또래쯤 됐을 법한 한 무리의 남녀를, 사장은 '진짜배기'라고 부르곤 했다.
4. [대국민당 집권 5년 차, 4월.]
어둠 속에서 섬광이 번뜩였다. 새하얗게 질린 육면체 공간 안에서 붉은 혈흔이 스멀거렸다.
5. 오후 7시 49분. 부산 국제항.
어둠이 내린 선착장에선 출항 준비가 한창이었다. 점멸하는 가로등 불빛에 오천 톤 규모의 부관 페리가 그 위용을 드러냈다.
6. 어릴 때 누구나 경험하지 않았나요? 밤길을 걷다 말고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을 때, 맑게 빛나는 달이 나를 따라오고 있음을 알게 되는 순간 말이에요.
7. 이런 얘길 하면 허풍쟁이 혹은 미치광이 취급을 받을 것이 뻔해서 단 한 번도 털어놓지 않았다. 내가 아주 작았을 때, 그러니까, 어머니의 배 속에서 엄지 같은 크기로 들어앉아 있었을 때의 일이다.
8. 하늘에 계신 옥제님께서는 땅 위의 세상이 궁금하시매 신수들을 보내어 그 소식을 듣곤하셨다. 그중 청란은 가장 날쌔어 옥제는 청란을 자주 부르셨다.
9. "지금 당장 자살은 불가능하세요."
이놈의 인생. 사는 거나 죽는 거나 정말 내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10. 핸드폰 벨 소리가 어둠 속에서 지루하게 울렸다. ㅇㅇ은 엎드린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벗은 등 위에 가볍게 놓여 있던 손이 ㅇㅇ의 날갯죽지를 살짝 건드렸다. 일어나서 전화를 받으라는 신호였다. ㅇㅇ은 움직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