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은 음습하고 더러웠다. 나와 잘 어울리는 곳이었기에 딱히 불만은 없었다. 차가운 시멘트 벽에 등을 붙이고 앉아 담배를 피웠다. 그러는 동안 너는 말 없이 책가방을 껴안고 내 입가에서 하얀 연기가 흐르는 것을 구경했다. "슬슬 지겨워지지 않았어?" "아직요." 그를 흘끗 바라보니 눈빛이 죽지도 않고 반짝거렸다. "즐겁긴 해?" "네." "이해가 안 되네." 정말이지, 일 년이 넘은 지금도 알 수가 없다. 작년 이맘때쯤 성인이 된 나는 고아원에서 나와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흡연을 일찍 시작하긴 했지만 골초까진 아니었는데, 그 시기엔 너무 힘들어서 하루에 한 갑은 피웠던 것 같다. 카게야마는 이 골목에서 처음 만났다. 일하고 있는 주점의 뒤편, 카게야마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꼭 지나야만 하는 곳. 매번 같은 시간에, 같은 모습으로 마주치길 몇 번, 처음으로 체육복 대신 교복을 입은 카게야마가 말했다. "이 골목에 누나 향이 너무 많이 나요." "...네?" "지나오고 나면 옷에 다 베거든요." "아아... 죄송..." 그때까지 나는 그 애가 엄청난 모범생인 줄 알았다. "..." "...할 말은 그게 끝?" "네." 당시에 왜 그랬냐 물어보니 그렇게 말하면 담배를 끊을줄 알았단다. 아무튼 그 사소한 만남이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너 자꾸 밤에 몰래 나와서 간접흡연 하지마." "왜요?" "운동부라며. 폐 고장나면 운동 못 한다?" "안 그래요." 내가 돌아보자 카게야마가 웃었다. "전 배구 좋아해서, 폐에 구멍나도 뛸 겁니다." 그 진심같은 말에 나는 담배를 껐다. "하, 내가 너 때문에 진짜 끊으려고 해." "진짜요?" "그래, 죄책감 생길 것 같거든." "책임감이 아니라요?" 마지막 남은 곽을 쓰레기통에 던졌다. 아깝지만, 앞으로 돈은 더 아낄 수 있겠지. "무슨 책임감." "뭔가... 얘를 데리고 살아야겠다는." "토비오야, 누나는 제 한 몫 챙기기도 바쁘다." 나는 웃으며 그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흩뜨렸다. "...저는 누나 몫도 챙길 수 있어요." "뭐?" "폐가 튼튼하거든요." "허." "그래서 오래 뛸 수 있어요." 검푸른 눈이 우수처럼 빛났다. 깨끗한 유리알 속 퀴퀴한 나의 모습이 비쳤다. "...자신만만하네." "사실이니까요." 카게야마는 나와는 다른 세상 사람같네. 잊고 있던 건 아니었는데 새삼 더 멀어진 기분이었다. "난 뛰어봤자 이 골목이 끝인데." 나의 자조섞인 말에도 카게야마는 웃지 않고 손을 뻗었다. "그러니까 같이 나가요." "..." "더 환한 곳으로 데려가 줄테니까." 순수한 희망이 담긴 말. "담배 끊은 기념으로 아이스크림 먹어요." 아무래도 내가 끊은 건 담배가 아닌 절망일지도 모르겠다. 2. 쿠니미
저주의 새벽이라 불리는 군대, 보랏빛 하늘을 닮은 혁명군이 무장을 한 채 절벽 끝에 선 우리를 향해 총구를 겨눴다. 어림잡아 수백명정도. "궁지에 몰렸네." "그러게." 쿠니미의 귀찮음 섞인 음성에 나른한 목소리로 회신했다. 우리는 반혁명군이었다. 억압과 폭정으로부터 권리를 되찾기 위한 혁명이란 정의에 반하는 자들. 그들이 생각하는 우리의 죄명이다. 거창하기도 하지. 나와 너는 단지, 부여된 능력을 살생에 쓰고 싶지 않을 뿐이었는데. "...케일라가 올려다본 하늘에서 신호하듯 총성이 울리면, 총알이 비처럼 쏟아졌다." "뭐야? 갑자기." "책에서 봤어." "...네가 책을 읽었다고?" "어." 나는 그의 옆 얼굴을 살폈다. 핏기 없는 흰 피부에 어울리지 않는 생채기가 잔뜩 나있었다. 우리는 계속해서 피를 흘렸지만, 딱히 눈물을 흘리진 않았다. "거기에 이런 대사가 나와." "해 봐." "빗방울이 관통한 살점은 따뜻했고, 케일라의 눈 앞을 뒤덮은 붉은 액체들은 마치 사랑에 빠진 자의 풍경처럼 보이게 했다." "잔인하네." "잔인해?" 난 낭만적이던데. 쿠니미의 말을 끝으로, 포고하듯 혁명군의 사이렌이 울렸다. [발포 명령 카운트를 시작한다. A31과 N76 반란 군사 병기들은 즉각 항복하라.]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따뜻한 온기와 차분하게 뛰고있는 맥박이 좋았다. 다만, 사랑에 빠진 풍경을 보기엔 쿠니미는 이미 눈을 잃었다. "미안." 나의 속삭임에 그는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어릴 적 인간 병기로서의 생활은 참혹했고, 열일곱이 되면 탈출을 하자고 약속한 것도 전부 저였으나, 죽음의 문턱에 이르니 군말없이 나를 따라나온 그에게 미안해졌다. "나 지금부터 고백 하나 할건데." [사격 준비 10,-] "떨리니까, 짧게 끝내줘." 우리는 뒷걸음질을 시작했다. "사실은 그때 키스하고 싶었어." 쿠니미가 말하는 그때란, 쫓기던 중 들어간 폐건물 지하에서 있었던 일일 것이다. 능력을 과용하면 신체에 발열이 일어나는데 그때 나는 온 몸이 타들어갈 것 처럼 뜨거워서, 온도가 낮은 그의 맨 몸을 껴안고 있었다. [6,] "하지 그랬냐." "어. 그거 억울해서라도 다음생에 다시 태어나려고." "태어났는데 우리 운명이 아니면 어쩌려고?" 나의 물음에 그가 나의 약지를 쥐었다. [4,] "그러니까 지금 결혼하자." "..." [3,] "부부로 묶이면 어떻게든 되겠지." [2,] "그럼 나도 지금부터 맹세 하나 할게." "응." [1,] 다시 태어나도 너 하나만을 사랑할 것을 맹세해. [0]영원히. [사격.] 몇분간의 끊임없는 총성이 멈추고 희뿌연 연기가 흩어졌다. "시체가 없습니다." 절벽으로부터 낙하한 자유로운 운명들의 행방은 불명이었다. 3. 후타쿠치
세상은 기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낮인데도 노을이 불그죽죽해서 마치 누군가의 내장 속에 들어온 듯 했다. 나는 무너져내리는 건물과 그 건물들의 잔해처럼 널브러진 시체를 피해 마트로 들어섰다. 이곳도 곧 녹아내릴 것이다. 하늘에선 밤마다 산성비가 쏟아지니까. "혹시 후타쿠치 켄지?" 걸음이 본능처럼 멈췄다. 날 아는 사람. 너무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라 잠시 사고가 느려졌다. "후타쿠치 켄지는 맞는데." "...헉." 막상 원하는대로 대답해주니 여자는 휙 뒤를 돌아버렸다. 그리곤 곧 목소리를 가다듬고 머리를 정돈하고서 다시 제 앞에 섰다. "진짜 켄지야?" "어." 그러자 여자는 환하게 웃었다. 사방에서는 비명과 통곡소리가 들리고 기괴한 붉은 조명이 깔린 이곳에서, 그녀만큼은 혼자 다른 세계를 살고 있는 것처럼 이상할정도로 밝고 깨끗한 모습이었다. "나, 사실 다테공고 배구부 엄청나게 팬이었거든. 응원도 자주 갔었는데...!" "아... 그래? 내가 기억력이 안 좋아서. 미안." "괜찮아. 나도 중간에는 전학을 가버려서 응원은 못가게 됐으니까. 늘 마음속에 걸렸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그 후로도 계속 배구했지? 나는 그 체육관 소리가 좋았거든. 켄지 네가 뛰어 오르면 공이 그대로 떨어지는...," 여자는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외치려던 말을 멈추었다. 나의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았음을 눈치챈 것이다. "전학을 갔구나." "아, 응...! 어쩌다보니 좀 멀리... 졸업 후에는 다시 돌아왔지만." "그럼 몰랐겠네. 너 가고 몇 달 뒤에 사고났을거야." "...사고?" "어. 배구는 그 후로 못했어. 나, 다리를 다쳐서." 가만히 서서 왼쪽 다리의 상실을 느낀다. 피부를 가르고 끊어진 힘줄을 붙이고 조각난 뼈 대신 차가운 금속을 넣었던 순간들을, 내 다리는 주마등처럼 기억해내고 있었다. 이제는 통증이 없음에도 종종 아파왔다. 심리적인 요인이겠지만, 그 심리적 현상으로 나는 서있다가도 주저앉고 걷다가도 넘어졌다. "....미안해." "하하, 아니 뭐. 이젠 다 끝났고. 딱히 네가 사과할 일은 아니니까." 억지로 자조하는 목소리가 듣기 싫었다. 지금 이 세계가 멸망하기 전부터 나의 세상은 망가져 있었다는 게. 수치를 들킨 것처럼 그녀를 바라보기가 껄끄러웠다. "..." 그녀는 잠시 망설이는듯 보이더니 아주 살짝 나를 안았다. 종말 후 처음 느껴보는 온기였다. "다시 만나서 반가워." 그 순간 아주 이상하고 낯선 감정이 들었다. 하늘에서 쏟아져내리는 산성비가 딱딱한 건물들을 녹여내듯이, 나도 눈물이 쏟아져서 잊으려고 외면하던 외로움을 들켰다. "..." "배구를 하던 네 모습에 반한것도 맞는데, 사실 난 가벼운 척하는 네가 늘 무거운 눈빛을 하고 있어서 좋았어." 살고 싶어지면 안되는 하늘에서 자꾸 눈이 부셨다. 4. 시라부
별이 총총 박힌 밤하늘, 여름날의 늦은 하굣길은 사람을 싱숭생숭하게 만들곤 한다. "시라부, 넌 좋겠다." "...뭐야, 갑자기." "넌 이런 고민 안 하겠지?" 내가 그의 눈 앞에 꾸깃꾸깃한 종이를 갖다 댔다. "진로 희망 조사서?" "어. 나 하고 싶은 게 진짜 하나도 없는데 어떡하냐." "할 거 없으면 의사해." "...너 진짜 재수없는 거 알지." 시라부는 나의 수학 성적을 잘 알고 있는 녀석이다. 게다가 엄마 친구의 아들이라 더 비참한 상황이다. 지금까지의 고교 생활 중 내가 특출나게 내세울건 없다. 부활동은 무난하게 도서부, 학급 위원을 한 것도 아니고, 예능체육쪽 재능도 그다지, 성적은 중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근데 넌 좀 대단하긴 하다." "딱히." "맨날 배구하면서 공부는 어떻게 그렇게 잘하는데?" "둘 중 하나겠지. 타고났거나 노력했거나." "오... 넌 어느쪽?" "난 둘 다지." 서서히 웃고 있는 입매가 파들거린다. "...짜증나는데 할 말이 없네." "뭘 그렇게 고민해?" "난 너랑 다르게 좋아하는것도 잘하는것도 없단 말이야." 시라부가 고개를 돌리며 별다른 반응없이 말했다. "아직 찾는 과정인가보지. 사람마다 속도가 같겠냐?" "어쨌든 지금 이걸 쓰는 시기니까... 남들도 평균적으로 이즈음엔 꿈을 찾았다는거 아냐." "그런걸로 불안해서 위축되면 커서 어떻게 살래." "하.. 이 공능제." 그의 철저한 팩트 공격에 나는 학을 뗐다. 이 놈은 어릴 때부터 변한 게 없어. 도대체 얘가 왜 인기가 있는건지, 의심으로 가득한 눈으로 그를 살피자, 시라부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나도 다 쉬운건 아냐." "뭐?진짜?" "넌 날 뭘로 생각하는거냐...?" "당연히 괴물, 아니면 도깨비." "나 간다." "아아, 죄송해요. 시라부님." 그가 걸음을 빨리하면 나는 그의 어깨에 매달려 아부를 떨어댔다. 아주 익숙한 우리의 장난. "좋아하는걸 일찍 발견한건 운이 좋았어. 눈에 띄게 반짝거렸으니까." "우연?" "우연같은 운명. 그러니까 너한테도 반드시 올 필연인거지."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들고 하늘을 쳐다봤다. "만약 발견하면 그때는 놓치지 말고 잡아." "잡았는데 막상 잘하지 못하면?" "그럼 뭐, 절망하는거지." "너도 절망했어?" "당연한거 아냐?근데 난 그 느낌 싫어서 빨리 더 잘하려고 하게 돼. 그게 내 단점이지." 느릿하게 걷던 나는 시라부가 앞을 보라며 핀잔을 주자 번뜩 위기감이 들었다. "야... 나 한번도 이런 생각해본적 없는데." "뭐." "너 좀 멋있는듯." "...짜증나." 그가 진심으로 질색하자 나는 황당해졌다. "아니, 왜 칭찬을 해줘도 난리지?" "너는 칭찬이 장난같아." "진심인데... 억울해." 내가 울상을 짓자 그가 탄식한다. "...넌 어떡하냐." "뭐가!" "빈칸에 의대 진학 써. 내가 보기엔 이건 정답이 있는 문제인 것 같다." 그가 나의 종이를 빼앗았다. 나는 어느순간 마음의 짐을 거둔다. 가벼운 종이 한 장이 억누르고 있던 학창시절, 딱 그만큼의 근심. "고마워." "뭐가." "너 원래 네 얘기 잘 안하잖아. 나 위로해주려고 오늘은 말 많이 했네. 착하다, 착해." "놀리지마."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좋아하는, 그리고 반짝거리는 우연 같은 운명이 너라면. 꿈의 동기가 된 사랑을 위해 노력하는 내가 눈에 선할지도 모르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