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매번 단명하는 저주에 걸렸다는 비극적 소스를 좀 추가한.
첫번째 생에서 드림주는 딱 18살이 되기 직전에 죽음. 스쿠나와 별다른 접점도 없었고 그냥 저잣거리을 지나던 그와 잠깐 스쳐지나간 정도? 정말 별거없는 만남이었고 서로를 기억도 못했음.
두번째 생에서 드림주는 운 좋게 영주의 딸로 태어나 호의호식하며 지냈지만 시대가 시대이다 보니 정치판의 가장 큰 장기말, 인생사 최대의 도박 혼인으로 엮인 이해관계에 강제로 팔려갈 예정이었겠지.
당차고 자기주장 강했던 그녀는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생판 처음 보는 남자와 얼굴 맞대고 사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해 집에서 뛰쳐나왔다가 스쿠나와 처음 마주하게 됐으면. 비가 억수처럼 내리는 날 앞도 뒤도 안 보고 뛰다가 우연찮게 스쿠나와 부딪히게 되는데. 이때 스쿠나 기분 잡쳤다고 생각하고 단번에 죽여버리려고 했지만 벌레 주제에 두려워하지도 않고 자기 눈을 똑바로 올려다보는 모습에 잠시 호오, 하며 흥미를 갖게 됐을 듯.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말고 썩 비켜라, 계집.
값비싼 기모노에 누가 봐도 한 때깔할 것 같은 모습에 드림주는 뭔가 이 남자 잡아야겠다 그런 생각이 들어 일단 붙잡고 보겠지. 잠시만요! 하면서. 감히 한낱 미물 따위가 자기 앞을 가로막는다며 이번에야 말로 죽여버려야겠다 싶던 찰나 쉽게 부서지지 않을 것 같은 기개의 눈동자를 보고 저걸 부수면 얼마나 재밌을까 싶어 일단 죽이지는 않을듯.
왜, 오늘 밤 여흥은 너로 하랴?
드림주의 턱을 손끝으로 살짝 들어 시선을 맞추며 킥킥 웃어대는 스쿠나. 자길 유곽 유녀 수준으로 취급하는 말에 기분이 확 상했겠지만 일단 아버지가 푼 사람들에게 잡히기 전에 해결하자며 "그 여흥이 몸 말고 다른 것으로도 된다면요." 답했을 것 같음.
당돌한 계집 같으니. 그 말 한마디를 남겨두고 혀를 끌끌 차며 말없이 앞서 나가는 스쿠나에 드림주는 망했다 싶어 자리에 얼어붙는데...
계서 뭐하나? 썩 따라붙지 않고. 그 조막만한 머리통을 굴려 붙잡은 동앗줄이라면 요긴하게 써야할 것 아니냐?
이미 자신의 의도를 다 간파했다는 듯 킥킥거리는 스쿠나를 보며 드림주 잠시 벙쪄 있다가 사부작거리는 발소리를 듣고 황급히 스쿠나 옆에 따라 붙었을 거임. 이미 다 아셨는 데도 왜 저를 살려두십니까? 대인께서는 그다지... 자선사업에 흥이 없으실 듯한데. 우물쭈물 말하는 그녀를 내려다보던 스쿠나. 비웃듯이 킥, 조그맣게 웃으며 "그리 보폭이 좁아서야 쓰겠느냐?" 드림주의 말에 대답도 안하고 자기 할말만 할듯. 정말 딱 여흥거리, 자기가 뭐라도 된듯 구는 기개를 박살냈을 때 절망적으로 허우적거리는 얼굴이 보고 싶어 데려가는 것일 뿐이었기 때문이었음.
중간 과정은 zipzip하고
어쨌거나 클리셰적으로 드림주에게 마음을 주게 된 스쿠나가 마냥 행복하지는 않아도 나름 소소한 행복을 추구할 수 있게 그녀를 옆에 두고 낯간지러운 단내 돋는 멘트도 가끔 툭툭 던지고. 남에게 신경 1도 쓰지 않을 것처럼 행동하다가도 드림주가 지나가다 한 소리 하나부터 열까지 다 기억해서 대뜸 뜬금없이 타이밍에 "갖고프다 하지 않았더냐" 하며 무심하게 선물처럼 툭 던져주는 일상이 반복되겠지.
그러던 와중 굉장히 뜬금없이, 아주 느닷없이 드림주가 사망하고 영원을 사는 스쿠나는 그녀를 기다리는데 만날 때마다 단명해서 그 굴레 속에서 지쳐가는 스쿠나가 보고 싶다. 저주의 왕도 어쩔 수 없는 게 있다는 적폐 설정으로다가.
세번째 삶에서는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 밥도 제대로 못 먹다가 굶어죽을 뻔해서야 스쿠나에게 발견되어 구조되었고.
네번째 삶에서는 악신을 모시는 사이비 마을에 태어나 제물처럼 사당에 바쳐지는데, 그 악신 사당 다 밀어버리고 드림주만 데리고 자기 거처로 온 스쿠나. 이대로 괜찮냐는 말에 "이번 생에서는 꽤 겁이 많구나." 그 눈은 여전한데도. 조금 미묘한 눈으로 말하는 그에 기억 없는 드림주만 ?? 된 모습이겠지.
그렇게 다섯번째 여섯번째 일곱번째... 계속되는 윤회 속에서 이제는 못해먹겠다, 아무리 끊어내려고 노력해도 끊어낼 수 없는 마음에 열이 뻗쳐 한 열번째 삶에서는 드림주를 직접 죽이려 들겠지. 이제 갓 성년이 된 드림주는 처음 보는 남자가 자신의 목을 분지를 것처럼 틀어쥐고 죽으라고 성을 내니 엉엉 울고 싶은 마음이었을 거임. 왜 이러냐는 말도 안 통함.
...그래, 계집. 날 잊고 지낸 삶은 평안하더냐?
나는 너 때문에 이리 머저리가 된 기분인데도.
결국 분에 못 이긴 스쿠나는 드림주의 숨이 멎을 때까지도 정신을 못 차리고 결국 그녀를 죽여버림. 살려달라고 빌던 목소리가 결국 끊기고 나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게 되겠지. 멍하니 그녀의 시신을 내려다보던 스쿠나는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시신을 품에 꼭 껴안고 말없이 눈을 감음.
다음에 또 만나요.
다음번에도 날 찾으러 와줄 거죠?
날 잊지 않을 거죠?
스쿠나.
스쿠나.
스쿠나.
다시 마주할 때마다 다른 얼굴 다른 목소리였지만 항상 남기던 유언은 거의 비슷비슷했기 때문에 오히려 유언 하나 없이 죽어버린 이번 생이 더 이상하게만 느껴졌음. ...거'지같은 계집. 이 나를 이리도 수고스럽게 만드는구나. 작게 중얼거리던 스쿠나는 다음 생에서는 절대 마주치지 않으리라 결심하며 자신이 죽여버린 연인의 모습을 끝까지 눈에 담을 거임. 잊지 않으려고. 어차피 영원을 산다면 계속 기다려야 하는 을은 자신이었으니까. 스쿠나는 그 을을 계속 자처할 생각이 없었음.
그렇게 시간이 아주 오래 흐른 현 시점, 2018년 무렵. 스쿠나 자신 역시 봉인당해 있다가 아주 오래간만에 깨어났고 세상이 아주 많이 변했다는 것을 깨달았을 거임. 그때 들었던 감정은 해방감과 절망감이었음. 이제 그녀 때문에 괜한 감정놀음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고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란 가능성도 몇 없으니.
어쩐지 심장이 조금 아릿했지만 상관없다 싶었지.
"어? 유우지!"
이타도리가 원래 다니던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현재 그의 여자친구이자 드림주의 또다른 환생인 그녀를 이타도리의 몸에서 다시 마주하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