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의 늦은 오후, 축축한 더위가 하늘에 눌러붙은 듯한 그런 날이었다. 가은은 좁은 원룸의 창문을 열어놓고 탁자에 엎드린 채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사방이 답답했다. 옷장엔 늘어날 생각이 없는 생활비, 바닥에는 마감이 끝난지 한참 된 낡은 신문지가 구겨져 있었다.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딘 지 몇 달이 지났지만, 그저 최저임금을 받는 하루하루는 계속 벗어나기 힘든 무거운 짐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맞은편에는 한수, 세 번째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인 남자친구가 앉아 있었다. 한수는 책상 위에 펼쳐둔 노트를 응시하고 있었지만, 집중하지 못한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가은의 가슴을 더욱 답답하게 만들었다.
“유럽 한 번 가보고 싶다,” 한수가 문득 입을 열었다. 가은은 의아하게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유럽?” 그녀는 짧게 물었다.
“응, 비행기 타고 어디 멀리 가보고 싶어. 이 답답한 서울을 벗어나서… 아무 생각 없이 걷고, 그냥 모든 걸 잊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아서.”
그의 말은 꿈 같았다. 가은은 잠시 상상해 보았다. 그들과는 너무도 먼 세계. 반짝이는 밤하늘 아래 조용히 흐르는 센강, 고즈넉한 이탈리아의 골목길, 햇살이 쏟아지는 스페인의 작은 마을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한수도, 그녀도 돈이 없다. 여행은 꿈에 불과하다.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그녀는 조용히 침묵을 삼켰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럼, 유럽 여행은 언제쯤 갈 수 있을까?" 말도 안 되는 질문이 목 끝에 걸렸지만,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며칠 후, 가은은 중고 거래 앱을 켰다. 멍하니 스크롤을 내리다 우연히 빔프로젝터가 눈에 들어왔다. 문득 생각이 스쳤다. 유럽에 직접 가지는 못하지만, 잠깐이라도 그 꿈을 꾸게 해줄 수 있지 않을까? 그녀는 남아 있던 적금을 깨 중고 빔프로젝터를 샀다. 통장 잔고가 바닥을 드러내는 것을 보며 현실의 무게가 가슴에 내려앉았지만, 한수의 기뻐하는 얼굴을 생각하며 간신히 미소를 지었다.
다음 주말, 한수가 도서관에서 돌아오자 가은은 그를 침대에 앉혔다. "잠깐 기다려 봐." 그녀는 서랍에서 빔프로젝터를 꺼내 방 한쪽에 설치하고, 미리 준비해둔 유럽 여행 영상을 틀었다. 벽에 비친 영상 속에는 아름다운 파리의 야경과, 한적한 이탈리아의 바닷가, 그리고 스페인의 태양이 가득 찬 거리들이 펼쳐졌다.
한수는 그저 놀란 표정으로 벽에 비친 영상을 바라보았다. "이게 뭐야?"
가은은 작은 미소를 지었다. "너, 유럽 가고 싶다며. 이건 가짜지만… 그래도 잠깐이라도 기분을 낼 수 있을까 해서."
그들은 침대에 나란히 앉아 여행 영상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영상 속 유럽의 도시들은 그들을 감싸 안는 듯 부드럽게 흘러갔다. 비록 진짜 여행은 아니지만, 그 순간만큼은 두 사람 모두 현실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는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계속해서 남아 있었다.
어느 순간, 한수가 가은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그의 손끝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떨림을 느끼며 그를 바라보았다. "고마워," 그가 조용히 말했다. "정말 고마워. 근데… 미안해."
그 말이 그녀의 가슴을 쿡 찔렀다. 그 말 속에는 고맙지만 미안한,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아픔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무언가를 말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침묵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안았다.
그리고 벽에 비치는 유럽 여행 영상 속, 그들은 서로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현실에서 도망치려는 듯, 그 순간만큼은 서로를 더욱 깊이 느끼고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