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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렸을 때부터 장르와 무관하게 어떤 게임이든 실력이 뛰어났다. 그중 롤을 가장 많이 했었는데, 정글 포지션을 주로 했었다. 샤코라는 챔피언의 주 장인이었고, 남들이 예상하지 못할 때 큰 위협감을 줄 수 있다는 것이 매력적이었다.

또 기억이 나는 것은 끈기가 좋았었다. 큰 스코어 차이로 지고 있을 때 친구들은 모두 항복하자고 했지만, 나는 어려운 상황에서 게임을 뒤집는 것이 너무 짜릿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긍정적으로 게임의 판도를 뒤집을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이 너무 즐거웠었다.

축구를 매우 잘했다. 미드필더 포지션을 매우 좋아했었고, 플레이메이커가 되는 상상을 하는 것을 좋아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는 축구에 미쳐서 아침에 매일 축구장에 가서 연습했던 기억이 있다. 발끝에서 나의 창의적인 플레이가 나오는 것이 너무 짜릿했다.

우리 집은 음악가 집안이다. 집에 들어가면 항상 피아노 소리가 계속해서 들렸었다. 이러한 이유에서인지 나는 첼로를 했었고, 초등학교 때 관현악부에서 실력이 뛰어났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또 기억나는 것이 박자 감각이 남들보다 뛰어났었다. 가끔 미처럼 신나는 음악을 틀어놓고 책상과 그릇을 드럼으로 사용하여 비트를 맞추는 것이 너무 즐거웠고, 마약에 중독된 것 같았다. 영상 편집을 할 때도 가장 중요한 것이 영상의 박자감이다. 너무 짜릿하다.

초등학교 때는 사고뭉치, 산만한 문제아 그 자체였다. 공부에는 관심이 많이 없던지라 수업 시간에 떠들고 교실에서 야구공을 던지고 복도에서 뛰어다니며 실내화 가방으로 스파링을 하던 그런 아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없다.

어렸을 때부터 길을 찾는 능력이 뛰어났었다. 아버지 차를 복잡한 백화점의 지하주차장에 주차했을 때, 그 위치를 헤매지 않고 한 번에 찾아내는 능력이 있었다. 어렸을 땐 부모님이 모른 척하시는 게 아닐까? 했었는데 지금 보니 남들보다 위치를 잘 찾는 게 맞다. 친구들끼리 여행을 가서도 길을 기억하고 방향을 찾는 능력이 두드러졌었다. 이런 점에서 모험가 기질이 있는 것 같긴 하다. 적당히 싸돌아다녀야지. 호기심 때문에 처음 가는 산의 산책로를 개척한 경험도 있다. 아무튼 새로운 곳을 가보는 것은 정말 즐거운 것 같다.

중학교 때는 암기 과목이 너무 재밌었다. 그 당시에는 역사와 사회 과목에서 대부분 100점을 맞아서 내가 역사와 사회에 재능이 있는 건가? 생각이 들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역사와 사회에 재능이 있다기보다 하나의 책을 내 머릿속에 채워 넣는 과정이 즐거워서 좋은 결과가 있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처음 책을 볼 때 아무 내용을 알지 못하지만, 그 책의 내용을 숲으로 바라보고 각각의 내용을 나무라고 보았을 때 방대한 숲에서 그 나무들을 익숙해지고 기억하는 과정이 즐거웠다. 이러한 이유에서인지 자격증 시험은 떨어져 본 적이 없다.

다만 내가 좋아하는 과목 외에는 전혀 공부를 하지 않았다. 하여 꼴지를 면하지 못했고, 흔히 질이 좋지 않은 학생들이 진학하는 공고에 진학하게 됐다.

공고에 진학했을 때부터 나의 사교성이 좋지 않음을 깨달았다. 야생마 같은 고등학생 친구들 사이에서 나의 성격은 극도로 소심해졌었다. 나는 친구들로부터 소외되지 않으려 담배를 배우게 됐었다. 다만, 담배에 중독되긴 싫어서 가오를 잡는 용도로 속담 반 + 겉담 반으로 담배를 폈다. 아마 그런 나에게 현타를 느꼈는지, 몇 번 담배를 펴보고 다시는 손을 대지는 않았다. 군대에서도 한 번 피고 끊었고 다시 필 생각도 없다.

아무튼 소심한 성격으로 친구들과 어울리는 게 너무 힘들었다. 밥 먹으러 갈 때도 대화에 잘 끼지 못해서 친구들이 묻는 질문에만 대답하고 그랬다. 다만 가끔 4차원적인 행동으로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했었는데 친구들은 나의 행동을 웃기다고 했던 기억이 있다. 아무튼 친구들에게 괴롭힘도 많이 당하던 고등학교 시절이었고 많이 힘들었었다. 그래도 운동과 게임은 잘했던지라 친구들과 잘 어울리긴 했었다. 축구, 배구, 탁구, 배드민턴 등 친구들보다 뛰어난 실력을 가졌고, 그 당시 유행하던 배틀그라운드, 오버워치, 롤, 피파, 스타크래프트 등의 게임에서도 뛰어난 실력을 가졌었다. 다만 고등학교 2~3학년 시절 나의 미래에 대해 현타가 왔나 보다. 특성화 고등학교인지라 친구들은 공부에 관심이 없었고, 나 역시 주변 환경이 큰 영향을 미쳐 공부에 관심이 없었다.

선생님들 역시 학생들을 믿지 못하였고, 졸업 후 고졸 취업으로 공장 생산직에 취업시키려는 마음뿐이었다.

나는 이러한 상황 탓에 부모님에게 자퇴를 하겠다고 말씀드렸지만, 나의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말씀드리지 못했을뿐더러, 부모님도 고등학교는 졸업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빠져있으셨다. 그 당시 나는 하루하루 괴롭힘과 주변 학우들의 불성실한 환경에 계속 있을 바에 자퇴 후 검정고시를 취득하고, 수능을 봐 대학교를 가야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그 당시 이 계획을 실행하지 못한 것을 아직까지 후회하고 있다.

그렇게 고3이 되고 특성화고 학생들은 대학교 입시보다도 취업의 방향성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전문대에 진학할 예정이었고 10월부터 2월까지 현장 실습을 나가게 되었다. 나는 누구보다 노예 마인드가 있는 것이었는지 공장의 직원이 시키는 잡무들을 그 누구보다 열심히 했었다. 지금에서야 가치 없는 일을 열심히 해도 인생의 발전에 큰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당시에는 세상의 어떤 일이든 열심히 하는 것이 젊은이의 덕목이라고 생각했었다. 친구들은 생산라인에서 단순 작업을 반복했었고,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를 마치는 정말 쳇바퀴 같은 인생을 잠시나마 살았었다.

단순히 이러한 직업이 부정적이라기보다 매일매일 같은 업무를 반복하는 작업은 나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깊게 깨달았다. 너무 즐겁지 않던 시기였다.

나는 전문대의 정보통신학과에 입학을 했고, 고등학교 때의 좋지 않았던 환경의 기억 때문인지 성실히 살았던 것 같다. 지금 돌아보면 고등학교 시절 공부를 하지 않았던 후회가 공부를 하려는 동기를 부여했던 것 같다.

대학교 시절에는 알바도 열심히 하고 대학 동기들도 자주 만나며 무난한 삶을 살았던 것 같다.

나는 21살에 군대에 입대를 하였고, 훈련소에서 친구의 꼬득임으로 수색대에 지원하게 되었다.

운이 좋았던 것인지 나빴던 것인지 GP를 근무하는 수색중대에 자대를 배치받게 되었다. 군대에 가서는 나의 과거 경험들 때문인지 그 누구보다 항상 긴장 상태를 유지했었다. 이러다 보니 실수는 잦아지고 동기들 사이에서도 실력이 좋지 못했다. 항상 혼났었던 것 같다. GP만의 폐쇄적인 분위기 때문인지 이등병 때는 차라리 감옥에 들어가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매일 혼나고 눈치를 보면서 부모님을 생각하고 버텼던 것 같다. 이대로 포기하고 전출을 가면 부모님이 많이 실망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아무튼 버티고 버티면서 간신히 군 생활을 견뎌내고 있었고, 상병~병장 즈음에 나의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같이 근무하던 ~상병, ~이병 덕분이다. ~상병의 경우 파견을 나온 아저씨였고, 굳이 열심히 하지 않았어도 될 잡무들을 솔선수범하며 열심히 하던 병사였다. 그때부터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 나오는 매력이 그 어떤 매력보다 멋진 것이라고 깨닫게 되었다. 그 병사는 일과를 마무리하고도 여가시간에는 자신의 꿈을 향해 노력했던 사람이다. 그림을 그리던 사람이었고, 다소 인상이 무서웠지만 누구보다 삶에 진심인 사람이었다. 다른 병사들은 싸지방에서 게임을 하거나 잠을 자던 환경에서도 묵묵히 혼자 책상을 펴고 그림을 그리던 그 사람의 모습은 아직까지 선명하다. 이때부터인지 나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또, 나의 후임으로 명문대생이 들어왔는데 나는 명문대에 들어가기 위해 했던 그 후임의 노력이 궁금했었다. 나는 마음 깊은 곳에서 좋은 대학교에 들어가 좋은 환경에서 공부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그 친구에게 내가 좋은 대학교에 갈 수 있을지 근무 중에 여러 번 물어봤었던 것 같다.

그 친구는 여러 번 수능을 봤다고 했고, 그 누구보다 자신을 믿었다고 한다. 아무튼 나도 당연히 할 수 있다고 조언을 해주었고, 병장이 돼서야 영어 단어장을 처음 펼쳐보았다.

이전에 궁금해서 토익 시험을 봤었는데 1달 반 정도 공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토익 점수가 325점이었다.

당연히 공부를 열심히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학창 시절 사회, 역사 과목은 좋은 성적을 받았었지만 영어 공부를 아예 하지 않았었다.

시중에서 유명하던 보카 단어장을 생활관에서 공부했었고, 공부를 해야겠다는 의지는 있었지만 남의 눈치를 많이 보는지라, 각 잡고 공부를 열심히 하지 못했었다. 동기들은 전부 스마트폰, TV를 보고 있었던지라 나의 모습이 너무 튈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러한 점에서 남들을 신경 쓰지 않고 묵묵히 공부하던 그 병사를 나는 잊지 못할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의지만을 모아 군대를 전역했고, 내가 다니던 학교에 복학하게 되었다. 복학한 후 공부를 해야겠다는 의지 때문인지 대부분 A 이상의 성적을 받아내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문대라는 한계점이 나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학교를 다니며 안내데스크 안에서 알바를 했었는데, 사람들이 묻는 질문에 응대하는 것이 묘한 뿌듯함과 행복의 감정을 느끼게 했다. 주변 동료들은 손님이 많으면 힘들다고 하던 것과는 달리 손님이 가득 차 줄의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바빴을 때 차근차근 문제를 해결하고 응대하는 것에 묘한 희열감을 느꼈다. 반면 고객이 너무 없어 한산할 때는 나의 존재에 대해 우울감을 느끼고 참을 수 없는 지루함을 느꼈었다. 아무튼 전문대학의 졸업을 앞두고, 나 역시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고, 국비 학원을 다녀 개발자로 취업할까? 아니면 입시를 치러 좋은 대학교에 가볼까?의 두 가지 갈림길에서 큰 고민을 했었다.

혼자 계속해서 무언가를 창조해 나간다는 것에 개발자가 되는 것도 좋은 선택지라고 생각했었지만, 그동안 살아오며 후회했던 공부에 대한 아쉬움이 나를 입시의 길로 이끌었다. 수능이라는 선택지도 긍정적으로 봤지만 아무래도 상대적으로 졸업까지 시간이 덜 걸리는 편입의 길을 선택하게 되었다.

과거 325점의 토익 성적을 가졌던 내가 편입을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그중에서도 나는 문과 편입에 도전하였는데, 그 이유 중 수학 공부를 해본 적이 없던 것보다도 단순히 미디어 분야에 대한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과거에 공부를 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후회감, 군대에서 만난 좋은 사람들에 대한 경험들이 합쳐져 “절대로 실패는 없을 것이다”라는 마인드셋을 지니게 해주었다.

새해 초 편입학원에 들어가기로 결정을 했고, 그 전에 10월부터 영어 공부를 시작하였다. 편입학원에 들어가기 전에 작은 목표를 세웠었는데, 편입을 도전하는 남들이 보기에는 보잘것없는 토익 성적인 700점을 받는 것이었다. 다만 나에게는 꿈만 같던 점수였는데 1형식 2형식의 존재와 동사의 단수 복수와 같은 기본적인 문법 지식도 없었을뿐더러 중학교 수준의 기본 단어들도 대부분 알지 못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공부에 대한 동기의 원기옥을 모아놨던 탓이었을까. 정말 열심히 공부해서 한 달 이내에 단어장 한 권을 다 외웠던 기억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75점이라는 아쉬운 성적을 받게 되었다. 남들이 볼 땐 우스운 성적일지 모르겠지만 기초도 없던 325점의 토익 점수를 가지고 있던 내가 이러한 점수를 받은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아무튼 편입학원에서 입시 생활을 하게 되었고, 누구보다 부족한 것을 알기에 하루 종일 공부를 했었다.

그래도 암기하는 것을 좋아했던 탓인지 수업 시간에 배운 내용을 습득하는 속도가 빨랐고, 문법책을 꼼꼼히 내 것으로 만드는 능력이 좋았던 것 같다. 단순히 외웠다기보다는 반복해서 접하는 것이 나의 공부법에 맞았다.

정말 누구보다 열심히 했던 것 같다. 사실 열심히 했다기보다도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고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나의 환경이 너무 행복했다. 과거의 환경에서는 대부분의 친구들이 공부를 하지 않았고 노는 것에 관심이 있다 보니 나 혼자 공부를 열심히 하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공부하는 환경에 있다 보니 오로지 나와의 대화를 하며 공부에만 정진할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아마 이러한 경험의 시작이 내가 눈치를 보며 살아가기보다 눈치 보지 않고 살아가는 성향으로 만든 것 같다. 아무튼 1년 동안 열심히 해서 건동홍 라인의 대학에 합격하게 되었다. 여러 대학에 합격했었는데, 시험장에서의 그 느낌이 새록새록 기억이 난다. 열심히 했던 과정 때문인지 한 문제 한 문제를 자신감 있게 풀 수 있었다. 비록 수능과 같이 어려운 시험은 아니었지만 과거 성실하지 않은 학생으로 살았던 나에게 편입시험의 합격은 뜻깊은 결과물이었다. 편입에 합격하고 나서는 성장에 목말라 있었다. 정말 과거에 대한 후회가 아니었다면 이런 원동력을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편입하고 나서는 도전의 연속이었다. 아무것도 지식이 없는 전공이었지만 항상 맨 앞자리에 앉아 수업을 들었었는데, 쪽팔림 당하는 것에 무뎌진 건지 교수님의 주 질문 타깃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맨 앞자리에 앉았었다. 물론 좋은 성적을 받은 것은 아니다. ㅎㅎ

아무튼 24시간이 모자라도록 학교생활과 대외활동, 공모전에 빠져 살았던 것 같다. 아예 다른 전공을 공부했던 차라 기존 학생들보다 열심히 했어야 했다. 좋은 환경에서 공부하다 보니 확실히 멋진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학벌이 멋짐의 강도를 정하지는 않겠지만, 대외활동을 하며 만난 명문대 친구들은 꿈과 실행력, 성실함이 확실히 뛰어났었다. 그 사람들과 같이 활동하고 어깨너머로 배웠던 열정의 경험은 나에게 큰 배움을 주었고, 이러한 배움은 공모전 수상이라는 결실을 선물하기도 하였다.

그 이후 한 학기를 마치고 데이터 분석에 관심이 생겨 복수 전공을 진행했다. 다소 늦은 시기에 복수 전공을 하는 차라 졸업을 기존 예정보다 늦게 하게 된다.

이전에 개발자의 꿈을 가지고 있던 차라 데이터 분석을 공부하며 그 교집합을 어느정도 맞춰 나갈 수 있었다.

다만, 사칙연산을 제외하고는 수학에 대해 무지했던지라 남들이 2~3주 전부터 시험공부를 했다면, 나는 개강 첫 주차부터 공부를 하고 추가적으로 공부를 했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B+라는 성적이 대부분이었다. 아쉬움도 있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수학 과목을 공부하고 시험을 봤다는 과정과 결과는 나도 노력을 하면 할 수 있다는 가치관을 더욱 확립시켰다.

그 이후에 데이터 분석 동아리를 하며 프로젝트도 해보고, SQLD와 ADsP 자격증을 취득하기도 했다. 편입한 학교에서의 3학년은 매우 빠르게 지나갔다. 3학년 시절 다양한 알바를 했었는데, 아침 6시에 출근하여 호텔 사우나에서 수건과 양말을 정리하는 일도 해봤다. 놀랐던 것은 이러한 알바에도 수많은 사람이 지원한다는 것이었고 그중에는 좋은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 역시 많이 지원한다는 것이었다. 다행히 나는 누구보다 빨리 지원해서 그 일을 할 수 있었다. 

그 이후에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해봤던 것 같다. 특히 명동 의류 매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남들에게 어울리는 의류를 추천하거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즐긴다는 것을 느꼈다. 타 팝업스토어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을 적에는 남자와는 거리가 먼 섬세함이 있었고, 상대방의 니즈를 파악하고 그에 맞는 솔루션을 제안하는 것에 행복을 느꼈다. 누군가의 고민을 해결하고 맞춤형 솔루션을 제안하는 것은 정말 즐거운 일이다. 

4학년이 되어서도 학교생활을 열심히 했다. 개인 공부는 열심히 하지 않더라도 팀 프로젝트는 그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 3학년 당시 편입생으로서 부족한 점이 많이 있었던지라 4학년 때는 누구보다 능숙하게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싶었다. 부족하긴 했지만 조장이 되어 팀원들을 이끌고 좋은 성적을 받았던 경험은 나에게 많은 성장을 주었던 경험이었다. 또, 학교를 다니며 스펙을 쌓기 위해 토익 시험을 준비했었는데, 880점의 성적을 받게 되었다. 커뮤니티에서 “요즘 토익 900점은 널렸다”라는 말이 있긴 했지만 과거 신발 사이즈에 불과했던 나의 점수가 큰 폭으로 성장했다는 것이 너무 기뻤다.

4학년 2학기에는 정보처리기사와 빅데이터분석기사에 도전해 취득하는 것에 성공하기도 하였다.

학교생활과 기사시험을 병행하다보니 밸런스가 약간 무너지기도 했었다.

추가로 더 많은 경험을 하고 싶어 창업캠프에도 도전하였고 좋은 팀원들과 주위의 사람을 만나 우수상을 수상하는 결실을 맺기도 하였다. 매우 훌륭한 사람들과 함께했던지라 내가 초라해지기도 하였지만, 나에게 많은 배움을 줬던지라 정말 감사한 사람들이다.

4학년을 마칠 때까지 내 주변에 스쳐 가는 좋은 사람들 덕분에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지금은 마지막 학기를 남겨둔 20대 중후반의 나이인 대학생이다.

아 그리고

공부, 알바, 대외활동, 공모전, 자격증, 헬스, 연애까지 편입 후 너무 열심히 살았던 탓인가 작년 말쯤에는 큰 우울감 역시 찾아오긴 했었다. 단기간에 많은 성과물을 가졌던 탓인지 최근에는 뭘 하더라도 내가 성장하고 있지 못하다는 회의감에 빠졌었다. 1분의 시간이라도 쉬고 있는 나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불안함이 눈을 가렸고, 남들이 보기에는 열심히 사는 사람으로 보였겠지만, 사실 불안한 감정을 느끼는 것이 두려워 무엇이라도 하며 발버둥 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나의 삶이 부정적으로 보였다는 것은 아니다. 불안함 그 자체도 나의 성장을 이끌어내기 때문에 감사한 존재였고, 이러한 삶을 살다 죽어도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초등 시절 이후부터 나의 행동을 돌아봤을 때 특정 분야의 과몰입 증상과 덤벙거림 그리고 4차원적인 성향이 ADHD를 의심하게 하였고, 정신과에서 진단을 받은 결과 나는 ADHD가 맞았었다. 그 이후부터 콘서타를 복용하고 있고, 확실히 이전보다 차분함을 느낀다. 지금은 여러 곳에 지원한 결과 방학 중 대기업에서 일 경험을 해보고 있다. 다만 ADHD 환자 특유의 특징인 것인가. 많은 업무를 숙지하는 것이 쉽지 않고, 실수가 잦기도 하다.

이러한 나의 부족함을 알기에 퇴근 후 잠들기 전까지 하루 동안 배웠던 것을 복기하고 시뮬레이션을 돌리며 정리하며 지내고 있다. 사수분께서는 나에게 기억력이 좋다는 칭찬을 하셨지만, 사실 기억하기 위해 끊임없는 연습을 해온 덕에 기억력이 좋아 보이는 것뿐이다. 즉석에서 빠짐없이 하나하나 메모하고 반복하는 남들에 비해 더 많은 노력을 투입한 결과이다. 회사생활을 조금 해보니, 나에 대해 고민이 많아진다. 앞으로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 AI와 기술이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이 길을 걸어가는 것이 맞는가? 등의 고민으로 가득하다.

데이터 분석에 관심을 가지고 숨 가쁘게 달려왔고 즐거웠지만, 내가 더 잘할 수 있는 일, 그리고 더 좋아하는 일을 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다.

매일매일 나에 대해 분석하고 고민해본 결과, AI 엔지니어, 데이터 분석가와 같은 직업의 이름보다도 **~을 하는 사람으로 나를 정의하는 것이 나에 대해 분명히 할 수 있었다.

나는 타인의 고민 혹은 문제들을 파악하고, 솔루션을 제안하여 만족감을 제공하는 것에 자아실현의 가치를 느끼는 사람이다.

마케팅 관련 학과에 진학한 것도 타인의 니즈를 파악하고 솔루션을 제안하고 싶은 동기에 도전을 한 것이었고,

데이터 분석 분야에 도전한 동기도 데이터 속에서 문제점을 파악하고 사람들에게 솔루션을 제안하고 싶은 동기 때문이었다.

안내데스크, 의류 매장, 팝업스토어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을 당시에도,

사람들이 가진 문제를 들어주고 해결하며 응대하는 것이 즐거웠었다. 아마 나에게 숨겨진 이러한 자아실현의 동기가 그러한 감정을 주었던 것 같다.

이러한 나에 대한 분석으로 최근 심리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무엇에 대해 매력을 느끼는지에 대한 관심이다.

이러한 관심을 살리기 위해 온라인 스토어를 하고 있고, 꽤나 즐거운 나날을 보내는 것 같다.

어렸을 때부터 남들보다 더 많은 경험을 해왔고, 많은 격변을 겪으며 살아왔다. ADHD의 특징이라 그런가 나는 할 줄 아는 것이 정말 많다. 어렸을 때부터 호기심이 있는 것은 다양하게 시도해봤고 금방 그만두기도 했었다.

나는 악기를 다룰 수 있고, 음악에 대한 관심이 많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공부를 잘하지 못했고 많은 부분에서 배움이 느렸던터라 배움이 느린 사람들의 마음을 잘 알고 있기도 하다.

나는 많은 운동을 잘하고 축구, 농구, 배구, 배드민턴, 탁구, 야구, 달리기 등의 운동에서 또래보다 좋은 능력을 보이기도 했다.

나는 게임을 좋아하며 그 중 전략을 세우는 게임에 능력이 뛰어났다.

나는 영상 편집을 할 수 있고, 감성적이고 박동감 있는 영상을 기획하고 편집하는 것을 잘한다.

나는 포토샵과 일러스트 등을 잘하고 디자인하는 것에 뿌듯함을 느낀다.

나는 마케팅을 공부했고, 여러 대외활동을 해보고 공모전에 수상한 경험이 있다.

나는 데이터 분석을 공부했고, 데이터를 보는 것이 즐겁다.

나는 생성형 AI를 사용하여 무언가를 만드는 것이 정말 재밌다.

나는 소비자의 심리를 파악하는 것이 정말 재미있고, 사람들에게 좋은 경험을 선사하고 싶다.

나는 인테리어에 민감하고, 조명과 배치하는 것에 관심이 많다.

나는 나만의 상품을 만들고 싶고, 나만의 브랜드를 브랜딩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나는 세상의 모든 것들에 스토리를 부여하고 싶고, 세상의 모든 것들을 아름답게 만들고 싶다.

나는 누구보다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 있고, 아침에 일어나서 잠들기 전까지 일만 하는 삶이 너무 행복할 것 같다.

나는 성장하지 않으면 불안하고, 제자리에 정체되는 삶이 너무 고통스럽다. 이러한 이유에서 공무원과 같은 성향의 직업은 맞지 않을 것 같다.

나는 사실 소심하고 남의 눈치를 많이 보는 성격이라 회사생활을 한다면 좋은 퍼포먼스를 내기 어려울 것 같다.

나는 자투리 시간에도 일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회사생활을 한다면 점심시간, 쉬는 시간에도 인간관계에 소비해야 한다는 것이 아쉽게 느껴진다. 대화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다. 불필요한 가십거리와 같은 이야기에 공감하기가 너무 힘들다.

최근 나에 대해 분석하는 시간을 많이 가져왔다. 다만, 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봤지만 이제 앞으로 어떤 직업을 가지고 어떤 일을 해야 할지 명확하게 결정하지는 못하였다. 나의 이러한 성향들을 돌아볼 때 나는 무엇을 하면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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