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 경기 종료 후 더 이상 서 있지 못할 정도로 뛰면 팬들이 찾아올 것이다”
언젠가 김병지에 K리그가 관중을 모을 수 있는 방법이 뭐냐고 물었을 때 들었던 답이다. 들으면서 무릎을 쳤다. 90분 그리고 추가시간 동안 인간이 뛸 수 없을 만한 거리를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뛰던 선수들이 종료 휘슬에 쓰러지듯 주저앉는 것을 보면 안쓰러움보다는 감동이 몰려온다. 특히 그들이 승리했을 때 감정은 더 커진다.
가학적인 속마음이 수면 위로 나온 것은 아니다. 일종의 인정이다. 선수들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을 눈과 마음으로 확인했을 때 마음이 반응하는 것이다. 10km가 넘는 거리를 뛰고, 거친 몸싸움까지 해야 하는 선수들의 수고를 인정했다는 이야기다. 42.195km를 뛴 마라토너가 1위로 결승선을 넘고 쓰러졌을 때, 눈물이 왈칵 올라오는 것과 같은 원리다.
“(추가시간에 넘어졌을 때) 물병이 날아온 지도 몰랐다. 사실 추가시간이 몇 분인지도 몰랐다. 너무 힘들었다” (김진현)
국가대표팀 경기를 보다 오랜만에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17일 호주 브리즈번에서 벌어진 한국과 호주의 ‘2015 호주아시안컵’ A조 3차전 경기가 끝난 뒤 한국 선수들은 그라운드에 쓰러졌다. 모든 베팅사이트에서 홈팀 호주의 우세를 예상했지만, 한국은 이정협의 결승골로 1-0으로 승리했다. 거친 경기가 끝난 뒤 골키퍼 김진현을 비롯해 거의 모든 선수들이 주저앉았다.
투혼이었다. 한국은 아시안컵 경기 중 처음으로 점유율에서 뒤졌다. 전반에는 35.2%, 후반에는 30.4%의 점유율을 보였다. 슈팅 숫자에서도 뒤졌다. 호주는 총 14개의 슈팅을 날렸고, 한국은 총 9개의 슈팅만을 기록했다. 한국은 호주의 거친 공격을 계속 막아내야 했다. 태클숫자가 27대11인 것을 보면 한국수비수들의 고생을 엿볼 수 있다. 골키퍼인 김진현도 상당한 거리를 뛰었다.
“이런 자세와 정신력이라면 계속 전진할 수 있을 것이다” (울리 슈틸리케 감독)
선수들이 뛴 거리가 많다고 해서, 모두 감동적인건 아니다. 기록이라는 숫자에 정신력과 같은 부분이 더해져야 반응이 일어난다. 울리 슈틸리케 감독이 경기가 끝난 후 선수들의 정신력을 치하했을 정도로 호주전의 훌륭했다. 막판에 호주의 파상공세에 시달릴 때도 ‘지지는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을 정도다.
선수들이 정신무장을 잘 하고 나온 결과다. 선수들은 경기 전날 한국 축구의 자존심을 회복하자고 마음을 모았다. 김창수는 “선수들끼리 이야기를 많이 했다. 우리가 언제부터 호주를 무서워했었나. 우리가 언제부터 아시아에서 이런 대우를 받았나. 경기를 하면 할수록 강해지는 것을 느꼈다”라고 말했다.
“국가대표라면 열심히 하는 건 기본이고 잘해야 한다고 말했다” (기성용)
주장 기성용은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보탰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잘해야 한다고, 이겨야 한다고 동료들을 독려했다. 기성용은 스스로 더 많이 뛰었다. 잉글리시프리미어리그의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다 20시간이 넘는 거리를 비행했지만, 더 많이 뛰었다. 기성용은 한국이 치른 조별리그 3경기에서 모두 풀타임 활약했다.
기성용은 “체력적인 부담이 없다면 거짓말”이라며 “3경기를 다 뛰었다. 하지만 주장이라면 팀에서 가장 큰 버팀목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같이 부상 선수들이 많고, A매치를 많이 안 뛴 새로운 선수들이 많은 상황에서 그 선수들에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도록 노력했다. 마지막까지 풀타임으로 뛸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라고 말했다.
“경기가 끝나고 (김)진현이이게 (정)성용이와 (김)승규가 뛰어가서 격려하는 걸 보았나? 모두 팀을 생각한다” (김봉수 GK 코치)
결과와 더불어 하나된 팀의 모습도 보였다. 이날 경기에 나선 선수들은 자신이 아니라 팀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보였다. 단순히 이기기 위해 뛰는 게 아니라, 팀을 위해 뛰었다. 결승골을 넣은 이정협은 “사실 뛰면서 많이 힘들었는데 다들 힘들어하는 게 보여서 티를 낼 수 없었다. 다 같이 열심히 했다”라고 말했다.
단 한 명만 선발로 나설 수 있는 골키퍼 포지션은 경쟁이 극심할 수밖에 없다. 경기 후 쓰러져 있는 김진현에게 다가가 격려와 위로를 한 정성용과 김승규의 모습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대표팀은 아시안컵을 치르면서 강해지고 있다. 최종 결과를 예측할 수 없지만, 선수들은 이날 경기에서 분명한 전기를 마련했다. 이날 경기가 뭉클함을 주는 이유다.
“8강부터 지면 바로 떨어진다. 오늘보다 더 집중해야 한다” (기성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