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 유료 소통앱 등장, 팬-아이돌 노골적인 관계 변화... 아이돌 상품화의 이면
아이돌은 환상을 판매하는 직업이라고 하던가. 이제 그들은 환상을 넘어 현실 속 자신의 감정과 모습까지 팔아야 하는 것으로 보인다. '판매'라는 표현은 노골적이지만, 이만큼 케이팝의 현실을 묘사할 단어도 없다.
아이돌이 자신의 감정마저 판매하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든 건 최근 공개된 르세라핌의 다큐멘터리 때문이다. 지난 29일 하이브가 공개한 르세라핌의 5부작 다큐멘터리 〈 Make It Look Easy >을 보며, 아이돌이 겪는 마음의 고통마저 상품의 영역이 됐다고 느꼈다. 해당 다큐멘터리는 2022년 연말 무대 연습부터 2024년 발매된 미니 3집 'EASY' 준비 기간까지 르세라핌이 보낸 지난 1년 여의 시간을 담았다. 다큐멘터리 속 카메라는 화려한 모습 뒷면에 숨은 르세라핌의 노력과 고통에 주목했다.
사실 아이돌 생활의 이면을 다룬 건 르세라핌만이 처음은 아니다. 앞서 BTS, 블랙핑크도 다큐멘터리를 공개했다. 사실 아이돌의 무대 위 모습을 공개하는 다큐멘터리는 아이돌 콘텐츠에서 빠질 수 없다. 하지만 르세라핌의 다큐멘터리는 좀 달랐다. 르세라핌 멤버들의 고통을 적나라하고, 지나칠 만큼 상세하게 묘사한다.
집요한 카메라
1화에서 멤버 은채는 컴백 쇼케이스에서 과호흡을 겪으면서 무대를 강행하고, 또 다른 멤버 사쿠라는 데뷔를 앞두고 불안함을 느끼며 산소마스크와 함께 연습한다. 노력이라 칭하기에는 과하게 괴로워하는 멤버들의 모습이 다큐멘터리 내내 등장한다.
2화에서 멤버 윤진은 "대중과 업계 사람들의 눈치를 보게 된다"며 연습하다가 눈물을 흘리고, 3화에서 멤버 사쿠라는 컴백 쇼 상영회를 진행하다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무대를 이탈한다. 촬영진까지 빠질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고,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연습할 때 잘 됐던 점이 (실전에서) 되지 못해서 팬들에게 미안했고 (그럼에도) 웃어야 해서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또 다른 회차에서 멤버들은 "왜 아이돌을 선택했을까", "이렇게 힘들면서 (아이돌을)해야 하나", "뭘 해야 행복할지 모르겠다" 등의 이야기를 나눈다. 마지막화 후반부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장면에서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탈진한 멤버들의 모습을 비춘다. 르세라핌의 그룹 콘셉트가 '두려움 없이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의지'인 만큼 그들이 겪은 어려움을 하나의 극적 요소로 쓴 건 아닌지 반문하게 된다.
이를 두고 "르세라핌을 더 응원하게 된다"는 긍정적인 반응이 있지만, "멤버들의 정신적 스트레스가 걱정스럽다"는 염려 섞인 의견도 나왔다. 특히 멤버들이 힘들어하는 장면을 두고 "감성팔이"라고 반응하거나 "콘셉트를 위한 보여주기"라고 평가하는 이들도 상당하다. 다큐멘터리에서 아이돌 생활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멤버들의 모습만 일부분 편집한 영상이 SNS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퍼지며 멤버들을 향한 악플이 늘고 있다.
판매자와 구매자 된 아이돌-팬
르세라핌의 다큐멘터리가 정확히 무엇을 의도하고 만든 건지 모르지만, 거기에도 '셀링 포인트(제품이나 서비스의 고유한 특징을 강조하고, 고객의 요구에 부합하는 가치를 제공하는 마케팅 전략 - 기자 말)'는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이돌은 '무엇'을 '어디까지' 판매하고, 또 우리는 어디까지 구매하는 것일까.
실제로 케이팝 시장에서 자주 쓰이는 단어는 '영업'과 '셀링 포인트'다. 마치 물건을 파는 영업맨처럼 자신만의 셀링 포인트를 찾아 대중에게 영업하는 아이돌만이 살아남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아이돌은 소통 능력과 자신이 겪은 힘듦까지 무기로 삼아 대중 앞에 서야 한다.
이러한 배경에는 케이팝 시장이 나날이 전 세계로 뻗어가고, 새로운 아이돌 그룹이 물밀듯이 데뷔해 언제든 '대체할 수 있다'는 분위기가 있다. 아이돌은 완벽한 '스타'이지만, 동시에 언제든지 또 다른 스타로 대체할 수 있는 '상품'이 된 것이다. 화려한 모습 뒤에 이면이 있기 마련이지만, 그 이면마저도 자본의 영역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됐다.
아이돌의 상품화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 중 하나는 '유료 소통 서비스'다. 이는 평균적으로 월 구독료 3500원~4500원을 지불하면 아이돌과 대화할 수 있는 서비스다. 1대1 대화창처럼 만들어진 플랫폼이기에 마치 연예인과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는 것처럼 느낄 수 있다. 동시에 해당 서비스는 철저히 자본주의적이다. 여러 명의 멤버를 결제하면 가격을 할인하고, 구독 기간이 짧으면 연예인에게 보낼 수 있는 글자 수 또한 제한한다.
사실 과거 아이돌과의 소통 방법은 '돈'보다 '마음'을 앞세웠다. 팬 카페를 통해 안부를 묻는 식이다. 각자 편한 시간에 글을 남기고 댓글을 다는 식이다. 하지만 이제 팬들은 아이돌과 소통하기 위해 돈을 내야 한다. 그러자 관계가 묘하게 변했다. 아이돌은 '대화'를 판매하는 판매자가, 팬들은 이를 구매한 구매자가 된 것이다. 그 부작용은 사랑보다 '가성비'를 따지게 된 팬덤 문화로 드러났다.
자신이 결제한 아이돌이 소통 앱에 자주 들어오지 않거나 짧은 문자를 보내면 팬들은 "돈값을 하지 못한다"고 반응하게 된 것이다. 실제로 한 아이돌 멤버의 일부 팬들은 해당 아이돌의 부족한 방문 횟수에 불만을 드러냈는데, 이는 해시태그 운동을 벌이며 (소통앱) 환불을 요구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아이돌이 소통앱에 힘들다고 털어놓거나 사적인 이야기를 하면 위로를 하는 팬도 있지만, "돈 내고 이런 이야기까지 들어야 하나"고 답하는 팬도 있다. 또 자신이 보낸 (소통앱) 메시지에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며 일방적으로 화를 내기도 한다. 소통앱에 사용이 금지된 단어를 피해 성희롱에 가까운 메시지를 보내 논란이 된 경우도 있다. 물론 소통앱 사용과 관련해 논란이 일 때 "얼마나 방문하는지는 자유", "소통을 강요할 수는 없다"면서 아이돌의 입장을 이해하는 팬들이 댓글을 달기도 한다.
유료 소통 서비스의 등장 이후 아이돌이 얼마나 친절하게 메시지를 보내거나 자주 사진을 보내는지는 새로운 '셀링 포인트'가 되기도 한다. 소위 말하는 '소통 맛집'을 찾아 구독하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아이돌은 불특정 다수에게 재미를 파는 '감정 노동자'가 된 것이다. 힘든 순간을 고백하며 눈물을 쏟은 르세라핌의 멤버 얼굴이 겹쳐진다. 전 세계로 뻗어나가는 케이팝, 과연 우리가 사랑하는 아이돌은 인형이 아닌 사람으로 존재하고 있을까.
오마이뉴스 이진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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