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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음악 평론가 정민재씨는 음주운전 혐의를 받는 아이돌 그룹 방탄소년단(BTS) 멤버 슈가(본명 민윤기·31)에 대해 “탈퇴하지 않을 경우 대중의 신뢰를 회복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지난 14일 한 언론 인터뷰에서 말했다가 ‘아미’(BTS 팬덤)의 집단 공격에 시달렸다. 일부 극성팬들은 정씨의 X(옛 트위터)·인스타그램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게시글로 몰려가 “뱉은 말을 철회하고, 슈가에게 사과하라”는 댓글 수백 개로 도배했고, 정씨의 구글 등 개인 SNS 계정 해킹을 통해 계정 폭파를 시도하는 등 여러 차례 보복을 가했다.
심지어 정씨 부인의 SNS 계정까지 좌표를 찍고 찾아와 “이혼해라”, “사과해라” 등의 악성 댓글을 쏟아냈다고 한다. 정씨는 하루에도 수십 통씩 국제번호로 BTS 해외 팬들로부터 항의 전화가 걸려와 불편을 겪어야 했다. 정씨는 “무지성적 힘의 논리로 뭉친, 패악질 수준의 팬덤 행패”라면서 “참고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이 아니기에 형사처벌 등 법적 조치를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이돌 팬덤의 맹목적인 옹호가 사이버 불링(괴롭힘)과 같이 외부를 향한 집단적 공격 행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정씨가 겪은 사례처럼 팬덤은 좋아하는 연예인을 무조건적으로 두둔하고 감싸고 돌면서, 연예인의 경솔한 행동을 지적한 상대방을 향해선 무차별적인 욕설과 비난을 쏟아내는 집단 린치 형태를 띤다.
강성 팬덤이 똘똘 뭉치는 ‘팬덤 실드’ 현상의 배경엔 폐쇄적·맹목적 옹호가 자리 잡고 있다. 국내 대중문화 평론가들 사이에선 아이돌 팬덤의 사이버 불링을 당해 칼럼이나 코멘트를 철회하거나 수정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평론가 A씨는 “팬덤 전체의 의견은 아니겠으나, 온라인상에서 2000~3000개의 악플 테러를 한 번에 받으면 심리적으로 위축되기 쉽다”고 토로했다.
특히 글로벌 팬덤의 규모가 클수록 사이버 불링의 강도는 더 세진다고 한다. 정 평론가는 “실제 악성 댓글 가운데 90%는 해외 팬에 의한 영어 댓글”이라며 “해외 팬덤이 국내보다 아이돌 스캔들에 관해 상대적으로 관대한 성향 때문으로 보인다”고 했다. 실제로 슈가의 팬들 사이에선 운전 중 술병을 인증하며 그를 옹호하는 일명 ‘슈가 챌린지’ 해시태그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인증 사진을 올린 건 대부분 해외 팬들이었다.
무조건적인 팬덤 실드는 연예인의 든든한 뒷배로 작용해 범죄 재발 방지는커녕 자숙을 제대로 하지 않아도 용인되는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는 등 각종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지난 5월 음주 뺑소니 사고를 저지른 가수 김호중의 팬들은 범죄 소식이 알려진 뒤에도 그를 응원하며 강행된 공연에 참석했다. 김호중 팬들은 이른바 ‘술 타기’(음주운전 뒤 도주해 추가로 술을 마셔 음주운전 처벌을 회피하는 수법)로 음주 측정을 방해한 김호중 사건의 재발을 막기 위해 일명 ‘김호중 방지법’을 발의한 국회의원들을 향해서도 “낙선운동을 하겠다”며 무더기 댓글 공격을 벌였다.
익명성에 기반을 두고 외부를 향해 돈과 영향력을 동원하던 극성팬들은 일명 ‘지갑으로 키운 내 새끼’라는 명목으로 연예인을 향해 스토킹 범죄을 일삼기도 한다. 실제로 카카오톡 오픈 채팅방과 X 등엔 유명 아이돌 그룹의 출·입국 항공권 정보를 판매하는 글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에 하이브 등 여러 소속사들은 아티스트들의 항공권 정보를 불법 취득하고 이를 거래한 이들에 대해 법적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하재근 문화평론가는 “이성과 합리성보다는 감정에 기반해 상대방을 공격하는 집단 행동이 이뤄지고 있는 양상”이라며 “미성숙한 아이돌 팬덤 문화는 대중적 지지를 얻기 힘들기 때문에 자정 작용을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서원 기자 kim.seowo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