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는 내 재임 중 벌어졌던 일들 가운데 가장 처참했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먼저 2014년 4월 16일에 발생한 세월호 침몰사고로 인해 단원고 학생을 비롯한 304명의 희생자가 발생하고, 국민 여러분께 큰 상처를 남기게 된 점에 대해 이 회고록을 빌려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
이 참사에 대해서는 당시 국정을 책임졌던 내가 누구보다 큰 비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그랬기에 당시 세간에서 나와 관련해 제기됐던 온갖 의혹이나 추문에 대해서 일일이 해명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 때문에 사실이 아닌 것들이 사실처럼 받아들여지고 그게 또다시 사회를 분열시키고 혼란스럽게 만드는 악순환이 발생했다.
그래서 나는 이번 기회를 통해 당시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소상히 밝히려고 한다.
빽빽한 스케줄을 소화하던 중 하루는 정호성 비서관이 나에게 “대통령님, 차라리 하루만 일정을 비우고 휴식을 취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건의했다.
사실 나도 ‘이러다가 큰일나겠다’ 싶었던 차라서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다. 무리하게 몸을 축내는 것보다 관저에 머무르면서 업무를 보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관저라고 해도 서재나 책상 등이 있어 충분히 업무가 가능한 환경이다. 그렇게 해서 쉬기로 한 날이 바로 운명의 날인 4월 16일이었다.
세월호 사고가 일어난 뒤 야당에선 내가 이날 왜 본관에 가지 않고 관저에 머물렀는지를 놓고 여러 의혹을 제기했다.
나중에 알아보니 정호성 비서관은 쉬기로 했던 4월 16일에 나의 연가 신청을 처리하지 않았다.
아마도 비공식적인 자체 휴일 정도로 간주했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이날을 공식 휴가로 생각했던 나와 혼선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이날 무수히 벌어진 혼선의 예고편이었다.
4월 16일 오전은 당연히 공식 일정이 없었지만 일상은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본관에는 가지 않는 대신 관저에서 그동안 처리하지 못했던 보고서 등을 읽으며 시간을 보낼 참이었다.
나중에 확인된 바로는 세월호가 기울어진다는 신고가 119에 처음 접수된 것은 이날 오전 8시 54분이다. 김장수 안보실장이 사고 발생을 인지한 것은 9시30분, 상황보고서 초안을 받고 나에게 직통전화를 걸었던 때가 오전 10시 12~13분이었다.
이때까지 사고 사실을 모르고 있던 나는 보고서를 읽다가 참고할 자료를 찾느라 휴대전화를 놔둔 채 다른 방에 가 있었다. 쉬는 날인 만큼 경계심이 다소 느슨해진 면도 있었다. 휴대전화를 그곳까지 들고 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상황이 급박했기에 김 실장은 계속 통화를 시도하기보다 안보실 직원을 통해 상황보고서 1보를 바로 관저로 보냈다. 그때가 오전 10시20분이었다. 많은 이가 비판하듯이 이때 나에게 첫 보고가 들어오는 데 약 7~8분이 늦어진 것이다.
보고서를 받아본 나는 깜짝 놀랐다. 배 안에 수 백 명이나 탑승하고 있다고 하니 무엇보다 이들의 안전부터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다. 나는 곧바로 김 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무엇보다 인명피해가 없도록 해야 합니다. 객실 곳곳을 다 찾아서 누락 인원이 없도록 하세요”라고 지시했다(오전 10시22분).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아 바로 다시 전화를 걸어 “배 곳곳을 샅샅이 다 합니다”라고 거듭 강조했다. 이어 김석균 해양경찰청장에게도 전화를 걸어 “해경특공대라도 투입해 여객선의 객실과 엔진실까지 철저하게 확인해 단 한 명의 인명피해도 발생하지 않도록 하세요”라고 주문했다(오전 10시 30분).
이것이 세월호 사고 발생을 인지한 직후 청와대의 첫 대응이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해경이 현장에 도착했던 오전 9시30분쯤 세월호는 좌현으로 기울어져 복원력을 상실했고, 1시간 뒤에는 거의 침몰한 상태였다(오전 10시 30분).
오전 11시쯤 관저에서 작은 탄성이 나왔다. 당시 YTN을 틀어놓고 있었는데 ‘전원 구조’라는 보도가 나온 것이다. 나는 참 다행이라고 안도했다. 언론을 통해 상황을 파악했던 것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안보실은 해경을 비롯한 여러 기관에서 올라온 보고들을 취합해서 가져오기 때문에 이런 급박한 사고 때는 오히려 보고가 언론 보도보다 늦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오전 11시20분 안보실에서 보낸 세 번째 상황보고서에 구조된 숫자가 예상보다 훨씬 적었을 때도 나는 다음 보고에는 추가 구조 인원이 포함될 것으로 기대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이때 언론 보도와 안보실에서 파악한 숫자가 다른 이유를 더 따져 물었어야 했다. 나는 언론에서 그런 중대한 일을 잘못 보도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했고, 약간의 보고 지연이 생긴 것으로 짐작했다. 돌이켜보면 너무 안이한 판단이었다.
민주당과 일부 언론은 4월 16일 오전 10시부터 내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를 방문한 오후 5시까지를 ‘잃어버린 7시간’, 또는 ‘세월호 7시간’이라고 명명하며 의혹을 제기하곤 했다.
혹자는 이날 내가 굿을 했다고 했고, 어떤 이는 호텔에서 정윤회씨와 밀회중이었다고 했다. 또 ‘성형 시술을 받았다’ ‘프로포폴을 투여했다’ 등의 이야기도 떠돌았다. 나중에 재판에서도 다뤄졌지만 아무런 근거도 없는 날조에 불과한 내용이다.
나는 세월호 구조가 진전이 없었다는 것이 확인된 오후부터 매시간 상황을 보고받으면서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
급할수록 냉정해져야 하는데, 사안이 사안인 만큼 나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최대한 빨리 중대본으로 가자고 지시했지만, 경호실에서는 “준비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조금 기다려주십시오”라는 연락이 왔다.
이동 때문에 교통 통제를 해야 하니 경찰청과도 협의해야 하고, 중대본에도 연락해야 하니 시간이 조금 걸린다는 것이다. 사실 대통령이 어딘가를 가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쩔 수 없이 “알겠다”고 답한 뒤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미용사가 왔다는 연락이 왔다.
‘호출한 적이 없는데, 미용사가 왔다니?’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청와대 관저 직원이 나의 외출 준비를 위해 미용사에게 급히 와달라는 연락을 했다는 것이다. 내가 서두르고 있다는 것을 몰랐던 모양이다.
경호실에서는 연락이 없는 상태였고, 긴장한 미용사는 “제가 빨리하면 금방 됩니다”라고 말하는데 이미 여기까지 온 그녀를 돌려보내기도 난처한 상황이었다.
결국 경호실 연락을 기다리는 동안 머리 손질을 맡기기로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가장 후회스러운 순간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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