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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자가 100만 명이 넘는 유명 과학 유튜버가 자신의 채널에 저출생 현상과 관련된 쥐 행동실험을 소개하면서 '저출산'이 아닌 '저출생'이란 용어를 썼다가 일부 구독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자 사과했다. 이 유튜버는 "저출생이 논란이 되는 단어인지 몰랐다"면서 고개를 숙였다.
유튜버 '과학드림'은 지난달 30일 자신의 채널에 미국의 동물행동학자이자 생태학자인 존 캘훈이 1968년 진행한 실험 '유니버스 25'를 소개했다. 이 실험은 총 3,840마리까지 증식이 가능한 크기의 우리에 쥐 4쌍을 넣은 뒤, 물과 식량을 무제한으로 공급하는 등 생육에 우호적인 환경을 조성해 개체수가 얼마나 늘어날 수 있는지 살펴본 실험이다.
시간이 흐르자 개체수는 2,200마리까지 늘어났다. 그러나 수컷 쥐들 간의 경쟁이 치열해지자 짝짓기에서 중도 이탈하는 수컷들이 발생했고, 암컷들도 새끼를 제대로 돌보지 않게 된다. 이후 우리에 살아남은 쥐는 한 마리도 없게 됐다. 과학드림은 "우리나라 저출생 문제를 얘기할 때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도 굉장히 많이 언급되는 실험"이라며 실험의 의미와 한국 상황에 시사하는 바를 자세히 소개했다. 과학드림은 "짝짓기에 참여하지 않는 '중도 포기 수컷'들이 발생하는 현상을 인간사회에 대입해 보면, 중도 포기자가 너무 많이 발생하지 않도록 국가나 사회에서 어느 정도 울타리를 만들어 주는 게 중요하지 않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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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출생 용어 논란인 줄 몰라" 사과문 올려
그런데 과학드림은 영상을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아 댓글을 통해 구독자들에게 사과했다. 그가 영상에서 '저출생'이라는 용어를 쓴 것에 불만을 표한 구독자들 때문이다. "저출생은 일반적인 용어가 아니다", "정치색이 드러난 용어다"라는 지적이 이어진 것. 과학드림은 영상 초반에 저출생 관련 기사 제목들을 그대로 인용하며 이 용어를 썼다. 댓글에 지적이 이어지자 과학드림은 "저출생이란 단어가 불편했다면 사과한다"면서 "특정 여성 단체를 지지하지도 않고, 어떤 정치적 의도를 내포한 것도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예전에 흘려 봤던 기사 중에 '대통령실에서 저출생이라고 표현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었고, 그때 '요즘엔 저출산이 아니라 저출생이라고 하는구나' 정도로 인식하고 사용했다"고 해명했다. 또 "두 단어(저출생과 저출산)의 옳고 그름을 떠나, 논란인 부분이 있었다면 다른 표현을 쓰거나 단어를 선택하는 데 있어 더 신중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대통령실도 '저출생대응수석실'
실제 과학드림이 언급한 것처럼 정부는 최근 저출생이란 용어를 쓰고 있다. 7월 대통령실 내 저출생대응수석실을 신설한 게 대표적인 예다. 통상적으로 저출산은 가임여성이 낳는 출생아 수가 적은 현상을 이르고, 저출생은 전체 인구 중 출생아 수가 적은 상태를 말한다.
정부가 저출생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저출산이란 용어가 출산의 주체인 여성에게만 인구 감소의 책임을 지운다는 비판이 있는 반면, 저출생은 출생인구가 줄어드는 사회구조에 주목하는 표현이라는 의견이 대두된 결과다. 일본이나 중국에서도 출생아 수가 줄어든다는 의미의 '소자화(少子化)'나 '저생육(低生育)' 같은 용어가 보편적이다. 다만 저출산·고령사회기본법에 '저출산'이란 단어가 명시돼 있어 정책 발표나 보도자료 등에서 두 단어가 혼용되고 있다. 국회에서도 법적 용어를 저출생으로 바꾸는 개정안 발의가 여러 차례 이뤄졌다.
전문가 "맥락 고려해 적절한 용어 써야"
전문가들은 저출산과 저출생이라는 용어에 편견을 갖기 보다는, 표현하고자 하는 맥락을 충분히 고려해 적절한 용어를 쓸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정재훈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저출산은 여성의 입장에서 왜 아이를 낳지 않는지를 고려했을 때 쓰는 용어이고, 저출생은 학교, 군대 문제 등 출생아 감소로 인한 인구 변동에 어떻게 정책적으로 대응할지 고민할 때 필요한 개념"이라면서 "저출산이라고 해서 무조건 성차별, 저출생이라고 해서 무조건 성평등한 용어인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김인선 부산대 여성연구소 교수도 "저출산과 저출생이 혼재돼서 쓰이고 있지만, 의미와 맥락을 따져 그에 맞는 용어를 쓰는 게 중요하다"면서 "저출산이나 유모차, 경력단절 여성과 같은 단어들을 바꾸자는 논의가 이어져온 것은 이런 용어들에 젠더 관점이 결여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해당 유튜버가 저출생이라는 용어를 쓴 의도를 고려치 않은 단순한 반대라면 '비판을 위한 비판'일 뿐이다"라고 강조했다.
이현주 기자 (memory@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