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부터 바로잡자. "곽튜브가 이나은의 학폭 의혹을 세탁했다"는 몰라도 '대리 용서'는 잘못된 표현이다. 곽튜브가 문제의 영상에서 성호라도 그었나. 수백만 학폭 피해자를 대신해 '이나은 학폭은 오해'라고 공증이라도 섰나.
'곽튜브, 네가 어떻게'는 진정성의 문제다. 곽튜브는 지옥 같은 학폭 피해를 딛고 200만 유튜버가 됐다.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그는 '학폭 피해'의 화신이다. 그런 사람이 왕따 가해자로 지목된 이나은을 두둔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지금까진 '학폭팔이'였냐. 묻는 것이다.
분노는 감정이다. 감정에 옳고 그름의 잣대를 대는 건 어폐다. 개연성은 따져볼 수 있다. 곽튜브를 향한 대중의 분노엔 개연성이 있다. 그러나 "말이 된다"고 무슨 비난 허가증이나 면허가 주어지는 건 아니다. 이때다 싶어 비판을 가장한 혐오를 쏟아내는 사람들 이야기다.
연예 기사 댓글을 막아놓으니 연예 관련 이슈가 터지면 온라인 커뮤니티에 투기장이 선다.
국내 온라인 커뮤니티 접속자 수 2위라는 XXXX에서 '곽튜브'를 검색해봤다.
이번 사안과 1도 관련 없는 무지성 외모 비하다.
자정 목소리가 없는 건 아니다. 곽튜브를 직격하는 도발적 제목의 기사를 퍼온 게시물에는 이런 베플이 달렸다. "세탁기 돌린 걸 비판한다고 살인 스텝 밟는다고 하냐? 왕따 피해자가 가해자가 세탁해준 걸 비판하랬더니 곽튜브 외모 비하, 성격 비하, 조롱 댓글 우르르 쏟아내고. 내가 본 것만 해도 이 정도인데 이렇게 하는 게 살인 스텝 아니냐?" 안타깝게도 17일 밤 11시 59분 기준 이 댓글에는 추천(496개)보다 비추천(665개)이 더 많다. 이런 의견이 '여론'은 아닌 셈이다.
비판의 미덕은 정교함에 있다. 마구잡이로 칼을 휘두르면 난사밖에 안 된다. 지금 곽튜브를 향한 비판의 70~80%는 인신공격에 가깝다. 공격 이유도 별거 없다. 외모가 싫어서. 행동이 싫어서. 스타일이 싫어서. 인상 비평 수준이다. 이들에게 이번 논란은 공격의 '명분'에 불과하다.
곽튜브는 '찐따'의 아이콘이기도 하다. 찐따는 "절름발이"를 뜻하는 일본어 '친바(ちんば)'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장애인 혐오 표현이라 쓰고 싶진 않지만, 다듬을 말이 마땅치 않아 입에 올린다.
곽튜브는 2022년 라이브 방송에서 더는 찐따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된 이유를 설명하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잘돼서 찐따들의 설움과 이들을 대변하고 싶었는데, 정작 날 욕하는 사람은 그들이더라." 자꾸 이 말이 머릿속을 맴돈다.
양원모 기자
https://m.entertain.naver.com/article/213/00013097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