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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K팝 팬들에게 포토카드, 팬 사인회 응모권 등 필요한 확률형 아이템만 보내주고, 실물 CD는 수수료를 받고 버려주는 ‘폐기 중간업자’들의 시장이 생긴 것으로 파악됐다. 공급자는 폐기될 것을 알고도 과잉 생산하고, 소비자는 억지로 폐기물을 구매하는 구조에 이제는 폐기를 전문으로 하는 업자까지 생겨난 셈이다. 현재의 K팝 산업이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비판이 나온다.
28일 취재 결과 해외 K팝 팬들은 ‘웨어하우스’라 불리는 중간업자들을 이용하고 있었다. X(구 트위터)나 커뮤니티 검색을 통해 온라인에 퍼져있는 웨어하우스 업자들을 접촉한 뒤 라인, 왓츠앱, 텔레그램 등 개인 메신저 주소를 받아 구매를 진행하는 식이다. 소규모 구매일 경우 업자들이 직접 앨범을 배송하고, 대량 구매일 경우엔 항공·선박 배송을 이용했다.
지난 21일 인도네시아의 K팝 팬 A씨를 통해 한 웨어하우스에 접촉해본 결과, 이들은 폐기 수수료를 따로 책정해서 받고 있었다. A씨가 “앨범이 아닌 포토카드만 필요하다”고 말하자 업자는 “앨범당 1000원의 ‘언박싱 수수료’가 부과된다”고 답했다. 이어 “언박싱 수수료는 선불, 포토카드 구입비는 후불로 입금해달라”고 말했다.
포토카드를 빼낸 앨범은 폐기됐다. A씨가 “그러면 앨범은 어디로 가느냐. 기부할 수 있냐”고 물어보자 업자는 “버릴 것”이라고 답했다. 일부 업체들은 구매자들에게 앨범을 기부한다고 안내하고 있었지만, 기부처가 없어 대부분 폐기될 것으로 추정된다. 익명을 요청한 한 보이그룹 팬은 “팬들이 앨범을 수백 장씩 사는 탓에 실물 CD는 처치 곤란”이라면서 “기부를 하려 해도 받아준다는 곳이 없어 결국엔 대부분 폐기되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거래가 은밀하게 이뤄지는 탓에 사기가 빈번하다. 인도네시아의 다른 K팝 팬 B씨는 서면 인터뷰에서 “2020년 여러 팬이 그룹을 만들어 웨어하우스애서 앨범을 (대량) 구입한 적이 있다”면서 “개당 4~5달러였는데 6개월을 기다린 뒤에도 앨범이 도착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금액이 꽤 컸지만 환불도 받지 못했다”고 했다. B씨 그룹이 받지 못한 앨범은 총 111장으로, 670만원 상당이다.
웨어하우스는 대체로 한국에 머무는 유학생이 한시적으로 관리하거나, 실체가 불분명한 한국 업체들이 운영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X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검색된 웨어하우스 주소 세 곳을 확인해보니 두 곳은 주소지 등록을 전문으로 하는 공유사무실이었다. 한 곳 역시 공장형 사무실을 주소로 하고 있었으나 직원이 없고 전화를 받지 않았다.
팬들은 K팝 산업이 왜곡됐다고 비판했다. 지난 20일 국회에서 열린 ‘지속가능한 케이팝 올바른 소비문화 조성을 통한 기후 대응 방안 모색’ 포럼에 참여한 로사 드 용 케이팝포플래닛 활동가는 “앨범을 살 때마다 죄책감이 느껴진다”면서 “확률형 시스템을 만들어 대량 구매를 강제하고, 팬들에게 죄책감을 전가하는 산업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환경부에 따르면 국내 기획사가 앨범 제작에 사용한 플라스틱은 2017년 55.8t에서 2022년 801.5t으로 매년 늘었다. 2022년 서클차트에 등록된 한 해 앨범 판매량은 7419만5554장이다. CD 한 장 무게가 18.8g이므로 CD에 사용된 플라스틱만 1394.9t에 달한다.
네덜란드인인 로사는 “K팝의 (왜곡된) 마케팅 상술이 국제적으로 성공을 거두면서 서구권에도 비슷한 사례들이 나오고 있다. 4가지 버전의 앨범을 냈던 테일러 스위프트가 한 예”라면서 “K팝이 세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단면”이라고 지적했다.
김나연 케이팝포플래닛 활동가는 “연예기획사가 확률형 시스템을 만들어 앨범 폐기를 전제로 상품을 과잉 생산하고 있다”면서 “아티스트의 순위를 올리고 싶어하는 팬들의 마음을 이용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영국의 경우 랜덤 요소가 있으면 차트에 집계가 되지 않고 있다”면서 “부산에서 열리는 ‘플라스틱 오염 종식을 위한 정부간 협상 위원회’ 제5차 회의(INC-5)를 계기로 오염을 종식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홍근 기자 redroot@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