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회장 퇴진 후 대외적으로 삼성그룹을 대표할 삼성생명 이수빈 회장이 2006년 가을 야구장을 찾은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와 나란히 앉아 있다.
당시 51세였던 이 회장이 1993년 10월 소위 삼성의 그 유명한 프랑크푸르트 회의에서 한 말이다. “마누라 빼고 다 바꾸라”는 화두를 던졌던 패기탱천의 이 회장이 66세의 나이에 드디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자신이 원했던 일은 아니었지만 15년 전 발언이 마치 부메랑 같은 예언으로 그의 뒤통수를 쳤다.
전화위복 계기 조성 “역시 삼성답다”
그러나 역시 삼성과 이 회장은은 강했고 ‘조준웅 특검’은 왜소했다.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에서 끝내 이변은 나타나지 않았다. 한때 핀치에 몰리기도 했던 이건희 회장은 장기적인 측면에서 뜻밖의 수확을 거뒀다. 아직 재판 절차가 마무리되지 않았지만 이재용 승계 체제를 대내외적으로 확인받는 의례를 무사히 통과했다. 삼성 내부를 잘 아는 사람들은 이것을 ‘횡재’로 표현한다. 바둑으로 말하면 ‘악수를 호수로 만드는’ 전화위복의 계기를 조성했고, 역시 삼성다운 저력을 보여줬다는 평가다.
특검팀의 수사가 100% 무의미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일단 후계 승계 과정에서 자행된 에버랜드 전환사채 발행은 회장 비서실의 조직적인 개입에 의한 것임을 밝혀냈다. 당시 그룹비서실 재무팀 소속 김인주 이사, 유석렬 재무팀장 등이 주도, 이 회장은 전환사채 발행 전후 두 차례에 걸쳐 이를 보고받았다는 점이 드러났다. 이에 따라 이건희, 현명관, 이학수, 유석렬, 김인주 등 관련자들은 ‘특경가법상’ 배임으로 기소됐다.
특검팀은 삼성생명 지분의 16%(2조3000억 원)가 이건희 회장의 차명지분이라는 것도 밝혀냈다. 또 전략기획실 직원의 이름으로 관리하는 자금이 대부분 이 회장의 차명자금이며 전체 규모는 4조5000억 원 정도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함께 특검은 이 회장의 차명재산을 관리하던 전략기획실 재무라인 임원들이 그 관리 과정에서 1199개의 차명계좌를 이용하여 삼성전자를 비롯한 삼성계열사 주식을 사고 팔아 남긴 차익 5643억 원에 대한 양도소득세 1128억 원을 포탈한 사실을 확인했다.
특검팀은 그러나 김용철 전 삼성구조본 법무팀장이 제기한 비자금 조성과 로비 의혹에 대해서는 전혀 새로운 사실을 밝혀내지 못했다. 특검팀은 로비 흔적이 전혀 없고, 공소시효도 이미 지났다고 판단, 로비 대상자와 이들을 담당한 삼성 쪽 인사 등을 모두 무혐의 처분했다.
특검팀을 바라보는 국민의 평가는 냉정했다. 경제개혁연대(소장 김상조 한성대 교수)가 한국사회여론연구소에 맡겨 지난 4월 22일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서는 61.3%가 ‘삼성에 면죄부를 준 봐주기 수사다. 불만족스럽다’는 의견을 보였다. ‘만족스럽다’고 답한 사람은 30.9%에 지나지 않았다.
삼성특검 드라마의 대미는 이건희 회장의 퇴진 발표와 삼성그룹 쇄신안이 장식했다. 이 회장이 그룹 회장에서 물러나고 전략기획실을 해체한다는 것이 그 골자다. 그러나 쇄신안이 삼성 개혁의 ‘실체적’ 동력으로 작용할지, 그 이면에 진정성이 담보돼 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이 회장의 군림을 가능케 하는 지분관계나 지배 시스템에는 사실상 변화가 없을 것이란 관측이 유력하기 때문이다.
아들과 관련된 일은 일관되게 함구
삼성 측은 계열사 사이의 출자 구조를 바꿀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삼성카드가 현행 금산법을 위반하면서 소유하고 있는 에버랜드 주식을 처분하겠다고 했을 뿐, 삼성물산, 삼성전자, 삼성SDI 사이의 순환출자를 해소할 생각은 없다는 것이다. 삼성생명, 삼성화재, 삼성증권 등 금융회사를 통한 비금융회사 지배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출자 구조를 바꾸지 않겠다는 것은 이건희 회장의 지배력을 유지하겠다는 것이며, 지배력 세습을 계속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법적 근거가 불확실한 구조조정본부나 전략기획실은 상법에도 없고 회사 정관에도 없는 조직이다. 오직 회장의 지시를 따르고 그에게만 보고하는 이 거대한 뇌수를 도려내겠다는 것이 이 회장의 선언이었다. 그러나 이재용으로 굳어진 삼성그룹의 후계 구도에 대해서는 움직일 수 없는 의지를 보여줬다. 그는 쇄신안 발표 시 아들 재용씨가 관련된 에버랜드 사건과 삼성SDS 사건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재용씨의 서울통신기술 인수와 계열사와의 e삼성 주식 거래에 대해서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재용씨가 에스원, 제일기획, 삼성엔지니어링 등이 상장 전 주식으로 많은 차익을 챙긴 점에 대해서도 사과하거나 보상을 약속하지 않았다. 아들이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일관되게 함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 회장은 공소시효와 국세 시스템을 통해서도 적지 않은 이득을 봤다. “특검에서 조세포탈 문제가 된 차명계좌에 대해 누락된 세금 등을 모두 납부하겠다”고 했지만 차명 소유했던 삼성생명 주식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그는 선대 이병철 회장으로부터 상속받은 1209만 주 중 1104만 주를 차명으로 보유하면서 상속세를 내지 않았다. 주당 70만 원으로 평가해서 계산하면 탈세액이 3조9000억 원에 이른다. 그러나 이 세금은 조세포탈죄의 공소시효가 지나 내지 않아도 되고 오히려 이참에 아직 실명화하지 못한 324만 주를 자신의 명의로 바꾸려 한다.
삼성특검 수사 결과 이건희 회장이 차명으로 보유하고 있는 삼성생명 주식은 모두 324만4800주로 전체 지분 16.22%에 이른다. 이 주식은 이수빈 삼성생명 회장, 이학수 삼성그룹 부회장 등 전·현직 임원 11명 명의로 관리해왔다. 이 주식이 실명 전환될 경우 이건희 회장의 삼성생명 지분은 현재 4.54%에서 20.76%로 늘어난다.
삼성생명은 이미 알려진 대로 삼성그룹 순환 출자의 중요고리를 차지하고 있다. 삼성그룹 지배구조는 에버랜드-삼성생명-삼성전자-삼성카드-에버랜드로 이어지는 순환출자 구조가 핵심이다. 이 회장이 삼성생명 지분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삼성 측은 경영쇄신안 발표에서 세금포탈 혐의를 받는 2조 원은 유익하게 쓰겠다고는 했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밝히지 않았다. 이 재산을 기존 삼성문화재단이나 삼성복지재단에 기부하거나, 아니면 추가로 공익재단을 만들 경우 이재용 전무의 지배구조는 더욱 공고해질 가능성이 있다. 즉 2조 원을 공익재단에 출연한 뒤 이 재단의 자금으로 삼성전자 주식을 매입해 삼성 일가, 궁극적으로 후계자인 이재용 전무의 지분 비율을 높여주는 시나리오다. 2조 원이면 현 시가로 삼성전자 주식 300만 주(2%)를 매입할 수 있다. 현재 이건희 회장 등 삼성 일가가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율이 13.77%인데 여기에 2%를 늘릴 수 있는 것이기에 경영권을 확고히 하는 데 엄청난 도움이 된다.
차명재산으로 삼성전자 지분 늘릴 듯
또 다른 차명재산인 삼성생명 지분 2조3000억 원어치도 장외에서 기관투자가 등에게 팔아 그 돈을 역시 삼성의 공익재단에 출연한 뒤 투자 목적이라는 명목으로 그 돈으로 삼성전자 지분을 추가로 매입할 것으로 재계는 보고 있다. 이 돈은 역시 2%가 넘는 지분을 살 수 있는 자금이다.
이 회장은 1997년 펴낸 저서 ‘이건희 에세이’를 통해 기업인의 사명을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서양에 노블리스 오블리제 전통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자랑스런 선비정신이 있다. 사회 지도층 인사에게 선비정신이 있다면 기업인에게도 널리 인류에 도움이 되고자 애쓰는 홍익인간의 정신이 있다.”
이건희 회장에게는 ‘사회와의 소통’을 의식적으로 피하려는 ‘코쿤’(cocoon: 누에고치) 기질이 있다. 강준만 전북대 신방과 교수는 이 회장이 ‘코쿤 기질’에서 벗어나 한국 사회 전체를 생각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노블리스 오블리제, 선비정신의 실현까지는 아니더라도 21세기 대한민국의 불행을 막기 위해 사회와의 소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삼성그룹의 경영쇄신안이 부정적 후폭풍을 가져올 것이란 전망도 있다. 4월 23일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이건희 회장의 퇴진으로 그룹의 구심력이 급속히 약해지고 있고 일본 기업들은 그간 삼성에 내준 시장을 되찾아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로 논평했다. 이에 따라 그동안 ‘오너-전략기획실-계열사’라는 3각 편대의 관리 경영에 익숙했던 삼성이 심각한 ‘리더십 부재’의 부작용을 겪을 수도 있다는 전망이다.
삼성이 가장 우려하는 부분은 적대적 인수·합병(M&A) 위협에 대한 노출과 특유의 ‘스피드(Speed) 경영’의 실종 가능성이다. 이상훈 미래에셋증권 애널리스트는 “적대적 M&A에 대한 제도적 방어책이 없는 상황에서 막대한 자본력을 가진 글로벌 기업이나 펀드의 공세가 시작될 경우 삼성 계열사들이 취약한 상황에 놓일 수밖에 없다”며 “경영쇄신안에서 밝힌 ‘그룹 계열사 간 공조를 통한 경영권 방어’가 느슨해질 경우 아무리 삼성이라 해도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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