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시절 문과를 나와 문레기가 된 박문도는
아들 문수가 문이과 통합 수학학원에 갔다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마음이 들떠서 정거장으로 마중을 나갔다.
문도는 아들이 살아 돌아왔다는 것에 기쁨을 느꼈음에도,
동시에 다쳤을까봐 내심 불안해했다.
정거장에서 문수가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문도는 미적분과 통계기본이라는 금서를 읽다 순사에게 발각되어 왼팔을 잃게 되었던 자신의 과거 일을 회상했다.
(... 중략)
정거장에 기차가 도착한 후,
문도는 다리 하나를 잃고 목발을 짚고 서있는 아들을 보고는 눈 앞이 아찔해졌다.
아무래도 학원에서 문송한 마음가짐을 갖지 않아 이과생들에게 집단린치를 맞은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다리 하나가 잘린 자신의 모습에 말을 잇지 못하는 아버지를 본 아들 문수는
북받쳐오르는 문송함에 그만
들고있던 수학1 참고서를 떨어트리고 말았다.
그것은 미적분과 통계기본과 다를 바 없이 금서로 지정된 A형 수능특강이었다.
문수는 뒤이어
다른 손에 쥐고 있던 목발도 놓쳐 땅 바닥에 문푸덕 쓰러지고 말았다.
문도는 지적불구자에 모자라 지체불구자까지 된 아들에게 버럭 화를 내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갔다.
문도의 눈가에 눈물이 흐르는 것은 아들 문수가 알 턱이 없었다.
(... 중략)
문도는 거나하게 술을 마시고 헌책방에 들러
문수에게 기하와 벡터 교과서를 사주었다.
책방에서 나왔을 때 문도는
이걸 내가 어떻게 풀겠냐는 아들의 하소연을 듣고는
문수를 다독일 뿐이었다.
아들에게 이해할리가 없는 책을 사주는 아버지의 마음을,
그 문쩔수 없음을,
아들은 과연 알았을까.
집으로 오는 길에 문도가 소변을 보기 위해 기하와벡터를 입에 물려고 하자
이 모습을 본 아들 문수가 교과서를 대신 들어주었다.
비록 중고품인 헌책이었지만
금서인 미적분과 통계기본과는 달리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었다.
문수는 의아해했다.
그렇게 부자는 묵묵히 걸어갔다.
(.. 중략)
외나무 다리에 이르렀을 때,
부자는 이과생을 만났다.
아무래도 과고생인가 싶은 것이
그 이과생은 한손에는 물리2 교과서를, 한손에는 옥스토비 일반화학을 들고있었다.
그의 등뒤에서는 사인함수가 마이너스 2파이부터 2파이까지 날개돋힌듯 찬란히 움직이며 황금빛을 내고 있었다.
문도는 머뭇거리던 문수에게 업히라고 했다.
문수는 목발과 헌 기벡 교과서를 각각 한 손에 들고 아버지의 등에 슬그머니 업혔다.
문도는 문수를 업고는
자신보다 새파랗게 어린 이과생의 눈치를 보며 구부정하게 고개를 내리깔고는 다리를 건너갔다.
이과생과 스쳐 지나가는 그 찰나의 순간에도
이과생의 등뒤에서 뿜어지는 찬란한 싸인 빛깔은
문도의 고개를 더욱 숙이게 할 뿐이었다.
문도는 자신의 고개와 허리가 꺾여진 각도를 통해
말하지 않아도 알 메세지를 이과생에게 전달했다.
아들 문수 역시
이과생과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짐에 따라
밝아져만가던 이과생의 찬란한 싸인 날개에 눈이 부셔
아버지의 어깻죽지에 고개를 파묻고는 눈을 질끈 감을 뿐이었다.
문수의 눈꺼풀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고
새카맣게 타들어가는 아버지 문도의 가슴 속엔
열등감, 수치심, 자괴감, 복종심 그리고
문송함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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