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 한국사 교과서 집필을 거부하는 이화여자대학교 역사학 관련 교수들의 성명서>
학계와 시민사회의 상식적 우려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여당은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화를 강행했다. 나아가 현행 검정교과서가 좌편향이라는 성립할 수 없는 거짓말로 국론을 분열시키고, 여론을 호도하며, 국가를 분열시키고 있다. 검정교과서는 교육부가 정한 집필기준에 따라 민간 출판사와 집필자들이 썼으며, 교육부의 검정절차를 거쳐 수정되었고, 최종적으로 학교와 교사라는 시장에 의해 선택받게 되어 있다. 형식은 검정이지만 내용은 국정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이런 교과서들이 좌편향이라면 교육부를 비롯한 정부 당국은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 그러나 누구 하나 입을 열어 책임을 말하지 않는다.
역사학은 과거를 다루는 학문이지만, 현재를 인식하는 거울이 되며, 미래를 열어가는 도약대가 된다. 역사학자들은 "역사적 사실"을 중시한다. 이미 고대로부터 역사가들이 강조한 역사서술의 자세는 "술이부작(述而不作)"이었다. 사실과 근거가 있으면 서술하고 해석하지만, 만들어 짓거나 창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공자시대의 역사학이 이러했으니, 역사학의 보수성을 알 수 있다.
역사학은 "달면 삼키고 쓰면 내뱉는(甘呑苦吐)" 학문이 아니다. 사실이 있으면 쓰고, 지도자의 공과는 엄정하게 평가한다. 이것이 사관(史官)의 정신이고, 사마천이 궁형(宮刑)의 치욕을 당하면서 세운 기초이다.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정책에 이르기까지 정부와 여당이 보여준 태도를 보면 정부가 역사를 통제하고, 창조하고, 이를 후세들에게 강요하려 한다는 우려를 금할 수 없다.
우리는 역사를 따뜻하지만 비판적으로, 긍정적이지만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도록 잘 가르치는 것이 21세기 한국사회를 풍요롭게 하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역사에 대해 자긍심을 갖는다는 것이 무비판적 옹호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세계사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비판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문명사회가 도달할 수 있는 인식 수준이다.
한국의 교과서 제도는 민주주의의 발전과 궤를 같이 하며 전진해 왔다. 해방 후 검인정제도가 유신시대의 국정화로 바뀌었고, 민주화와 함께 검인정 제도로 변화했다. 그런데 이제 분단국가라는 이유로, 역사교육의 통일성을 주장하며 국정화를 강행하고 있다. 한국사 국정화가 국제적 상식과 헌법가치에도 걸맞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오직 독재국가와 전체주의 국가들만이 역사교과서와 역사교육을 독점하고 있다.
때문에 정부의 국정화 정책은 시대착오적이며, 비민주주의적이며, 비교육적이고 21세기 국제적 상식에 현저히 어긋나는 것이다.
이에 이화여자대학교의 역사학 관련 교수들은 집필을 포함해서 국정 교과서와 관련된 모든 절차에 협력을 거부하는 뜻을 밝힌다.
2015년 10월 15일
김영미, 차미희, 정병준, 정혜중, 진세정, 오영찬, 노상호, 남종국, 이석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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