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조선의 삼도수군통제사. 시호는 충무공
해전 23전 23승이라는 불가사의한 전적의 소유자
7년 왜란의 전황을 역전시키며 조선왕조를 구원해냄
자신을 시기하는 왕의 고문을 받으면서도
현지조달만으로 전쟁물자를 마련하며 아군의스무배가 넘는 적을 물리침.
라고 말해 자신이 넬슨보다 우위에 있다는 표현을 한다. 그러자 기자왈, 그렇다면 조선의 이순신 장군과 비교하면 어떻느냐 하자,"이순신 장군에 비하면 나는 일개 하사관에 불과하다. 만일 이순신 장군이 나의 함대를 가지고 있었다면 세계의 바다를 제패했을 것이다."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러시아 함대와 일전을 치르기 위해 도고는 이순신 장군의 영혼에 기원하는 의식을 갖기도 했으며 일제 때는 일본의 해군 사령부가 있던 경남 진해에서 약 40km 떨어진 통영 충렬사에 가 주기적으로 진혼제를 지내는 것이 일본 해군의 중요 행사 중 하나였다고 한다.
2. 와키자카가 본 이순신
와키자카는 2천의 군사로 약 5~10만명(정확한설은 없음. 우리역사에는 5~6만명이라고 하고 일본역사에는 8~10만이라고 함)정도 되는 조선육군을 물리친 명장중에 명장)
와키자카는 한산도대첩 이후로 충격에 6일을 굶었다고 본인이 그렇게 기록을 하고 있으니 그 충격은 대단했었나 봅니다.식음을 전폐하고 내가 왜졌는지 생각하고 고민하는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나는 이순신이라는 조선의 장수를 몰랐다. 단지 해전에서 몇번 이긴 그저 그런 다른 조선장수 정도였을거라 생각하였다.하지만 내가 겪은 그 한번의 이순신 그는 여느 조선의 장수와는 달랐다. 나는 그 두려움에 떨려 음식을 몇일 몇날을 먹을수가 없었으며 앞으로의 전쟁에 임해야하는 장수로써 나의 직무를 다할수 있을련지 의문이 갔다.
이순신장군에대한 본인의 생각과 조선수군과 있었던 전투내용을 상세히 기록해 뒀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흥미로운점은 와키자카가 쓴 내용을 보면....
내가 제일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순신이며 가장 미운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좋아하는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흠숭하는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죽이고싶은 사람 역시 이순신이며 가장 차를 함께하고싶은이도 바로 이순신이다.
3.명의 도독 진린이 본 이순신
명나라의 황제 신종(만력제)은 조선에서 진린도독으로부터 한통의 서신을 받는다.
황제폐하 이곳 조선에서 전란이 끝나면 조선의 왕에게 명을 내리시어 조선국 통제사 이순신을 요동으로 오라 하게 하소서. 신(臣)이 본 이순신은 략이 매우 튀어날뿐만 아니라 그 성품과 또한 장수로 지녀야할 품덕을 고르 지닌 바 만일 조선수군통제사 이순신을 황제폐하께서 귀히 여기신다면 우리명(明)국의 화근인 저 오랑케(훗날청國)를 견제할수 있을뿐 아니라, 저 오랑케의 땅 모두를 우리의 명(明)국으로 귀속시킬수 있을것이옵니다.
혹여 황제폐하께서 통제사 이순신의 장수됨을 걱정하신다면 신(臣)이 간청하옵건데 통제사 이순신은 전란이 일어나고 수년간 수십차례의 전투에서 단 한번도 패하지 않았음에도 조선의 국왕은 통제사 이순신을 업신여기며 또한 조정대신들 또한 이순신의 공적에 질투를 하여 수없이 이간질과 모함을 하였으며, 급기야는 통제사의 충의를 의심하여 결국에는 그를 조선수군통제사 지위를 빼앗아 백의종군에 임하게 하였나이다
허나 통제사 이순신은 그러한 모함과 멸시에도 굴하지않고 국왕에게 충의 보였으니 이어찌 장수가 지녀야할 가장큰 덕목이라 하지 않을수 있겠나이까. 조선국왕은 원균에게 조선통제사 지위권을 주었으나 그 원균이 자만심으로 인하여 수백척에 달한 함대를 전멸케 하였고 단 10여척만이 남았으메 당황한 조선국왕은 이순신을 다시불러 조선수군통제사에게 봉했으나, 이순신은 단 한번의 불평없이 충의를 보여 10여척의 함대로 수백척의 왜선을 통쾌하게도 격파하였나이다.
허나 조선의 국왕과 조정대신들은 아직도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또다시 통제사 이순신을 업신여기고 있나이다. 만일 전란이 끝이난다면 통제사 이순신의 그목숨은 바로 풍전등화가 될것이 뻔하며, 조정대신들과 국왕은 반드시 통제사 이순신을 해하려고 할것입니다.
황제폐하 바라옵건데 통제사 이순신의 목숨을 구명해주소서. 통제사 이순신을 황제폐하의 신하로 두소서. 황제폐하께서 통제사 이순신에게 덕을 베푸신다면 통제사이순신분명히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황제폐하게 충(忠)을 다할것이옵니다.
부디 통제사 이순신을 거두시어 저 북쪽의 오랑케(훗날의청국)를 견제케 하소서
4.일본 해군대좌 사토오 데츠다로 옛부터 장군으로서 묘법을 다한 자는 한둘에 그치지 않는다. 해군 장군으로서 이를 살펴보면 동양에서는 한국의 이순신, 서양에서는 영국의 NELSON(1758-1805)을 들지 않을 수 없다. 불행히도 이순신은 조선에 태어났기 때문에 서양에 전하지 못하고 있지만 임진왜란의 문헌을 보면 실로 훌륭한 해군장군이다. 서양에서 이에 필적할 자를 찾는 다면 네덜란드의 Ruyter Michiel(1607-1678) 이상이 되어야 한다. 넬슨과 같은 사람은 그 인격에 있어서도 도저히 어깨를 견줄 수가 없다.
5.일본 해군준장 사토-데쯔라로 1926년 "조선지방행정" 제6권 2월호 "절세의 명장 이순신"에서 "장군의 위대한 인격, 뛰어난 전략, 천제적인 창의력, 외교적인 수완등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절세의 명장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있다. 해군장군인 나로서는 평생을 두고 경모하는 바다의 장수로 네덜란드의 Ruyter Michiel과 조선의 이순신이 있다. 그 중에서 갑과 을을 정하라 한다면 서슴치 않고 이순신을 갑으로 추천하는 바이다. 영국의 넬슨이 세계적인 명장으로 명성이 높은 것은 누구나 잘 아는 바이지만 그 인격에 있어서나 청의성에 있어서는 도저히 이순신의 짝이 될 수 없다 프랑스의 장군 "스후란", 미국의 장군 "아랏카트"와 같은 세계적인 명장들도 존경할 만하다 하지만 넬슨 이하의 인물이다. 로이테르는 인격과 역량, 경력도 이 장군과 비슷하지만 장군으로서 필요로 하는 창의성에 있어서는 한 수 꺾이는 것같이 보인다. 이순신 장군은 풍신수길의 목적을 좌절케 하였으며 바다를 제압하는 것이 국방상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사실적으로 증명한 명장이었는데 중도에서 모함을 당하여 백의종군 하였으나 어떠한 원망도 하지 않고 고통을 달게 받았으니 이 한가지 사실만 보더라도 장군의 인격의 고매함을 알 수 있다.장군은 군기에 엄하고 위엄이 있으며 부하 사랑하기를 친자식같이 하였으며 기분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매사에 정성으로 임하는 모범적인 장군이었다.장군은 평소 그의 뜻을 전하기를 " 장부가 세상에 태어나서 나라에 쓰이게 되면 죽음으로 충성을 다 할 것이오, 만약 쓰이지 못하면 들에서 밭갈이 하는 것으로 족하다. 사람에게 아부하여 영화를 도모하는 것은 나의 큰 수치다"라고 하였으니 이 한마디로 그의 인격을 알아보기 충분하다.
6.영국 해군준장 G. A. Ballard
이순신은 서양 사학자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순신은 전략적 상황을 널리 파악하고 해군전술의 비상한 기술을 가지고 전쟁의 유일한 참 정신인 불굴의 공격원칙에 의하여 항상 고무된 통솔원칙을 겸비하고 있었다. 그의 맹렬한 공격은 절대로 맹목적인 모험이 아니었다. 영국인에게 Nelson,과 견줄 수 있는 해군제독이 있다는 사실을 시인하기는 힘든 일이지만 이순신이 동양의 위대한 해군사령관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정치적 업적
1. 농업의 장려
(1) 대규모 수리시설 도강언 정비 : 작물 생산량 폭발적으로 증가. 초주 曰 " 타국 풍년작이 우리 평년작, 타국 평년작이 우리 흉년작 " , 화양국지 曰 " 물이 가물어도 사람들이 굶주림을 알지 못하고, 흉년이 없어 천하가 이를 하늘의 곳간이라 일컬었다 " / 현 중국의 도강언에는 도강언의 유지 및 보수에 공이 있는 사람들이 동상으로 서 있는데, 제갈량 동상도 서 있음.
(2) 기타 수리시설 정비 : 진 - 한 시대에 건설됐던 제방을 비롯한 수리시설들을 정비 및 보수.
(3) 한중의 농토 개간/둔전 진행 : 북벌 전선이자 요충지인 한중에서 군량 자급자족 가능. 병사들과 백성들이 같은 농경지에서 농사를 하면서도 백성들이 불편하게 여기지 않는 기현상 발생. 한중의 개간과 둔전은 제갈량 사후까지 계속 이어짐.
2. 소금의 생산/관리 정비
(1) 생산과 관리의 체계화 : 전문 부서 염부 ( 鹽府 ) 를 만들어 소금의 생산을 체계적으로 관리. 유능했던 책임자 왕련, 여예 등의 노력으로 촉한의 소금 생산량이 크게 증가. 촉한에서 생산된 소금은 오나라로 수출되기도 함.
(2) 염정 ( 鹽井 = 소금 우물 ) 의 개발 : 제갈량의 노력으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염정들이 개발됨. 좌사의 글 <촉도부蜀都賦>에서 " 집집마다 염정이 있다 " 라고 언급 / 송대의 시인 소동파는 <제갈염정諸葛鹽井>이라는 시를 짓고, 자신이 주를 달아 14개의 " 제갈염정諸葛鹽井 " 이 산 아래에 있다고 전함.
(3) 소금의 유통 촉진 : 가격은 낮추고, 품질은 개량하여 소금의 유통을 촉진시키고 세금 수입도 증가하는 일거양득의 현상.
(4) 화정 ( 火井 = 천연가스 ) 의 이용 : 소금의 순도와 생산량 증대. 화정을 이용하여 생산한 소금은 여타 생산 방법의 2배에 가까운 생산량을 보임 -> 진나라 사람 이흥은 제갈량의 4대 개발 업적 중 하나로 소금 우물을 꼽음.
3. 촉금 ( 蜀錦 ) 산업 정비
(1) 생산과 관리의 체계화 = 금관 ( 錦官 ) 설치 : 촉금 사업은 관영/민영의 구분 없이 금관의 직, 간접적 관리를 받음.
(2) 교역으로 인한 막대한 수익 : 위나라의 조비, 조예는 모두 촉금 덕후. 위나라는 적대 관계임에도 불구 촉금을 대규모로 수입, 이는 촉한에서 막대한 양의 수익 내지 군자금으로 전환 -> 위나라에 촉금 팔아 번 돈으로 위나라를 친다.
(3) 오나라와의 교역에서도 촉금은 상등품 : 양국의 외교에서 촉금이 예물로 사용됨.
(4) 최고 책임자인 승상이 모범 : 제갈량이 임종에 이르러 스스로 언급하기를, 자택에 800 그루의 뽕나무가 있어 자식들이 먹고 살 걱정이 없다 / 국내 촉금의 과다 사용을 막기 위해 스스로 검소를 실천 -> 촉한 관리들 대다수가 청렴, 검소.
4. 남중의 개발
(1) 농업 장려 : 촉한의 농경 기술을 전파 -> 농기구와 가축을 지원하고 농사 경작을 가르침.
(2) 소금 생산 : 남중 지역에 염관을 설치 -> 남중 지역 소금 생산량 대폭 증가, 남중 경제력 향상 / 촉한 정권의 염세 수입 증가
(3) 의사소통 문제 해결 : " 승상 제갈량이 친히 도보 ( 圖譜 ) 를 그려 교화를 행하다 " ( From. 제갈량 평전 )
(4) 남중 출신 인재 발탁 : 맹획은 중앙에서 어사중승까지 승진, 맹염은 보한장군 + 제갈량 북벌에 종군, 찬습은 영군
(5) 선정으로 교화 : 이민족이 중앙 정권에서 파견된 관리들 칭송하고 사당 세워 추모하는 나라는 삼국 중 촉한이 유일. 현재까지도 남중 지방 곳곳에는 제갈량과 관련된 전설 및 설화, 유적 등이 즐비하다고 전함.
5. 인재 선발
(1) 능력 위주의 인재 선발 : 이엄보다 관위가 낮았던 양홍을 이엄과 동급 인사로 발탁. 뒷날에는 양홍보다 관위가 낮았던 하지를 양홍과 동급 인사로 발탁. 위나라 항장 출신의 강유, 왕평 등도 중용.
(2) 실적의 입증을 중시 : 1차 북벌 당시 왕평의 훌륭한 뒤처리 및 사후조치를 높게 평가하여 중용, 장완/비의/동윤 등의 내정계 인재들은 모두 밑바닥에서부터 차근차근 실적을 쌓아 제갈량의 심복 내지 후계자로 자리매김함.
(3) 인재 임용을 위한 노력 : 성도 남쪽에 높은 대를 쌓아 각지의 선비들을 초청 ( 제갈량 평전 ) , 아랫사람들에게 문무 양면의 인재들을 적극 추천할 것을 권장 -> 칭요주교 ( 稱姚伷交 ) 로 요주를 표창하며 인재 천거의 중요성 강조.
6. 법제의 바른 시행
(1) 촉한의 법 ' 촉과 ' 제정을 주도 ( 법정, 이엄, 유파, 이적 등도 함께 참여 )
(2) 내분/정쟁 부작용 최소화 : 하라는 일 제대로 안 하고 + 구석 타령하며 역적질 사주하고 + 황제에게 거짓말하고 + 정권 최고 책임자에게 개긴 인물을 사형시키지 않고 유배에서 끝낸 건 동시대에 촉한 밖에 없음. 심지어 아들은 연좌도 안 걸리고 중랑장으로 계속 복무.
(3) 법 앞에선 만민 평등 : 사적으로도 친분 깊고, 공적으로도 심복이었던 마속도 군령 위반 처벌을 위해 예외 없이 참형. 전쟁 패배 책임을 지고 스스로의 관직을 강등한 최고 책임자 역시 동시대에선 제갈량이 유일한 사례.
(4) 공정한 법률에 대한 찬사 : 진나라 사람 이흥은 " ( 제갈량의 형법 집행이 ) 정나라보다 공정하고, 교화는 노나라보다 아름답다 " 고 찬탄하는 동시에 " ( 제갈량은 ) 관중과 안영에 그치지 않고, 고요나 이윤에 비견된다 " 고 극찬함.
7. 오나라와의 외교
(1) 명분과 실리를 적절히 운용하며 외교 관계 수립 : 제갈량이 선정/파견한 등지, 진진, 비의 등은 모두 외교관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 -> 등지와 비의는 손권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기도 함.
(2) 외교 전략문 절맹호의 작성 : 외교 관계에 있어 명분과 실리의 조화를 추구, 국교를 성공적으로 수립.
군사적 업적
1. 완벽함에 가까운 대군 통제 및 운용
(1) 회전/야전 불패 신화 : 사마의, 장합, 곽회, 비요 등은 모두 제갈량을 상대로 한 야전에서 패배 ( 노성/기산/상규 등 ) , 장합은 아예 목문에서 전사. 그나마 진창에서 20일 농성한 학소가 제갈량에게 한방 먹였다고 할 만한 유일 사례 / 선제기의 제갈량군 1만 참수 기록, 후방 급습 성과 기록 등은 왜곡 의심 -> 사마광의 자치통감에서는 선제기 기록을 불신하여 아예 싣지 않음.
(2) 퇴각전 하나는 역대 최고 : 별동대 괴멸, 군량 부족 등으로 퇴각할 때마다 신속 정확하게 철수. 추격으로 인한 피해는 거의 없을 뿐더러, 만일 퇴각하는 제갈량군을 추격할 경우 그 추격군은 패배 확정. ( 왕쌍/장합 )
2. 팔진법의 개발
(1) 팔진법의 혁신 : 진나라 사람 이흥이 " 제갈량의 팔진법은 손자, 오자병법에도 없다 " 라고 말할 정도로 혁신적 개량.
(2) 진형 구축에서 최고의 효능 발휘 : 사마의의 " 천하의 기재 " 평가는 제갈량의 진형을 검토한 후의 발언.
(3) 대군 운용의 정수 : 제갈량이 인솔하는 촉한 군대의 통제 및 운용은 팔진법에 기초.
(4) 후대에 이르기까지 활용 : 서진의 명장 마륭은 팔진법을 활용하여 강력한 선비족 수령인 독발수기능을 대파하고 그의 목을 벰. 당나라 명장 이정은 제갈량의 팔진법을 개량하여 최강의 대(對) 기병진법 육화진을 개발 -> 남송의 악비 등장 이전까지 제갈량의 팔진법은 실전에서 계속 활용됨.
3. 군사 장비의 개발
(1) 십시연노 ( = 원융노 ) 개발 : 진나라 사람 이흥은 이를 신노 ( 神弩 ) 라 부르며 극찬. 강력한 위력으로 인해 송나라 사람 왕응린은 십시연노를 최산노 ( 摧山弩 ) , 즉 산을 무너뜨리는 노라고 부름.
(2) 목우/유마의 개발 : 군량 수송 장비의 개발, 익주 험지의 수송 능력 강화.
(3) 기본 장비의 품질 강화 : 제갈량과 포원이 제작한 칼 ( 刀 ) 은 쇠구슬을 가득 채운 대나무 통을 가볍게 잘라버리는 위력을 발휘하여 신도 ( 神刀 ) 라고 불림 / 역시 제갈량과 포원이 제작한 철투구는 쇠뇌에 맞아도 뚫리지 않았다고 전함 / 전투용 도끼와 칼, 창 등의 장비 품질 상향을 위해 노력 -> 제작에 소홀할 경우 직접 문책.
4. 이민족과의 군사 협력
(1) 선비족과의 연계 : 제갈량 북벌 당시 선비족장 가비능이 제갈량을 도왔다는 기록이 있음.
(2) 남만족 출신 병력의 활용 : 남만을 평정한 후, 청강의 부족들 중 일부를 촉군 부대로 편제 -> 오부영군으로 불리는 이 부대는 왕평 휘하에서 활약, 231년 북벌 당시 장합을 격퇴하는 등의 전공을 세움.
(3) 그 외의 이민족과의 관계 : 강족, 저족 등과의 여타 이민족과 우호적인 관계 유지.
그 외 - 후대의 평가
(1)진수 왈 : 제갈량은 상국(相國)이 되어 백성을 어루만지고 의궤(儀軌-예법의 본보기)를 보이고, 관직을 간략히 하여 권제(權制-임시 제도)에 따르고, 성심을 열어 공도(公道)를 배풀었다. 충성을 다하고 보탬이 된 자는 비록 원수라도 반드시 상주고, 법을 어기고 태만한 자는 비록 친한 자라도 반드시 벌주었다. 죄를 인정하고 실토한 자는 비록 중죄라도 반드시 풀어주고, 헛된 말로 교묘히 꾸미는 자는 비록 가벼운 죄라도 반드시 죽였다. 선행이 작다 하여 상주지 않는 일이 없고, 악행이 작다 하여 문책하지 않는 일이 없었다. 모든 일을 정련(精練)히 하여 그 근본을 다스리고, 명분에 따라 그 실질을 책임지우며 헛된 것은 입에 담지도 않았다. 마침내 나라 안 모든 이가 그를 두려워하면서 경애하고, 비록 형정(刑政)이 준엄했으나 원망하는 자가 없었으니, 이는 그 마음씀이 공평하며 권하고 경계하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정사 삼국지 - 제갈량전)
진수가 상소문에 평가한 제갈량
날 소하(蕭何)는 한신(韓信)을 추천하고 관중(管仲)은 왕자(王子) 성보(城父)를 천거했는데, 이는 모두 자신의 장점을 헤아려볼 때 모든 것을 겸하여 가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제갈량의 기량은 정리(政理-정치)에 능하니 또한관중, 소하의 아필(亞匹-버금가는 짝, 동류)이라 할 만합니다. 그러나 당시 명장 중에 성보, 한신 같은 이가 없어 이 때문에 공업이 지체되고 대의를 이룰 수 없었던 것입니다. 대저 천명이 돌아가는 곳은 정해져 있어 (사람의) 지력(智力)으로 다툴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2)원준 왈 : 6척의 고아(유선)를 맡아 한 나라의 정무를 총괄하고, 범용한 군주를 섬기며 전권(專權)했으나 예(禮)를 잃지 않았고, 군주의 사무를 대행했으나 국인(國人)들이 의심하지 않았으니, 이와 같은 즉 군신 백성들이 마음으로 흔쾌히 봉대했음을 알 수 있소. 법을 행함이 엄격한데도 국인들이 기쁘게 복종하고, 백성을 부려 그 힘을 다하게 해도 아랫사람들이 원망하지 않았소. 그 군사들이 출입할 때는 빈객처럼 하니 행군할 때 도적질하지 않고, 꼴과 땔나무를 베는 자들은 사냥하지 않으니 마치 중국에 있는 듯 했소. 그가 용병함에는 산처럼 머물며 바람처럼 진퇴(進退)하고 군사가 출전하면 천하가 진동하니 인심(人心)이 근심하지 않았소. 제갈량이 죽은 뒤 지금까지 수십년이 지났는데 국인들이 노래하며 그리워하여 마치 주나라 사람들이 소공(召公)을 그리워하는 듯 하오. 공자가 이르길 '옹(雍)은 가히 임금 노릇을 할 만하다'고 했으니 제갈량에도 이러한 점이 있었소.( 정사 삼국지 방 - 제갈량전 )
(3)장엄 왈 : 공명( 孔明 )은 파, 촉 땅에서 일어나 1주(州)의 선비에 의지하니 대국에 비하면 그 전사( 戰士 ), 인민( 人民 )이 9분의 1정도에 불과했으나, 대오(大吳)에 예물을 바치면서도 북적(北敵)과 맞서고, 밭같고 싸우며 대오를 갖춰 형법이 엄정, 가지런하고, 보졸 수만을 거느리고 기산(祁山)으로 장구( 長驅-멀리 달려감 )하니, 개연히 하수, 낙수에서 말에게 물 먹일 뜻이 있었다. 중달(仲達)은 천하에 열 배의 땅에 의거하여 겸병지중(兼幷之衆)을 거느리고도, 견고한 성을 점거하고 정예를 끼고는 적을 사로잡을 뜻이 없고 스스로 보존하는데 힘쓸 뿐 공명이 스스로 오고 가게 만들었다. 만약 이 사람(제갈량)이 죽지 않았다면 끝내 그 뜻을 펼치며, 해를 이어 궁리하고 바삐 다그치며 모략을 일으켰을 것이니 즉 옹주, 양주는 갑옷을 벗지 못하고 중국은 안장을 풀 수 없어 승부의 형세는 또한 이미 결정되었다 할 것이다. 지난날 자산( 子産 )이 정나라를 다스릴 때 제후들이 감히 군사를 내지 못햇고 촉상 ( 蜀相 - 촉나라 재상, 즉 제갈량 )이 이에 가깝다 할 수 있으니, 사마의에 비하면 또한 뛰어나지 않은가! ( 정사 삼국지 - 제갈량전 )
(4) 이흥 왈 : (요약) 제갈량의 주획 ( 籌畫 - 계첵을 짜고 계획을 세움 ) 은 비할 이가 없고, 문장과 언변의 밝음이 장문중보다 나으며, 명철하고 충성을 지킴은 관중과 악으보다 낫고, 군주의 임종에 이르러 겸손하였던 것은 허유 ( 許由 - 요임금의 선양을 거부한 인물 ) 보다 나았다 ... 형벌은 정나라보다 공정하고, 교화는 노나라보다 아름다우니, 촉나라 사람들이 수치를 알았고 하수와 위수가 안거하였다. 고요와 이윤에 비견할 만하니, 관중과 안영에 그치지 않는다.
(5) 배송지 왈 : ...( 제갈량이 ) 만약 중화를 거닐며 그 뛰어난 재주를 펼쳤더라면, 아무리 선비가 많다 한들 어찌 가리고 막혔겠는가! 위씨 ( 魏氏 - 위나라 ) 에 몸을 맡겨 그 재주와 기상을 펼쳤더라면 실로 진장문 ( 진군 ) 이나 사마중달 ( 사마의 ) 도 감히 대등히 겨루지 못하였을 것이거늘, 하물며 나머지 선비들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6) 두보 왈 : 이윤과 여상(태공망)에 백중하며, 천하가 그 밑에 있었다면 소하와 조참도 가볍게 눌렀을 것이다.
(7) 주희 왈 : 맹자 이후의 인물이 있다면 장량과 제갈량 뿐이다.
(8) 왕부지 왈 : 군사를 다스릴 수 없을 때 그 ( 제갈량 ) 만이 이를 다스렸고, 백성을 다스릴 수 없을 때도 그만이 이를 다스렸다. 정치가 편안하지 못할 때 그만이 이를 편안케 했고, 나라의 살림이 어려울 때 그만이 이를 풍족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