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토끼전쟁
19세기에 이르러 한 호주의 어느 백인은 자신의 광활한 농장에서 토끼를 사냥하며 여가를 보내고싶었고 영국의 친척에게 토끼를 좀
보내달라고하였다. 사실 이미 18세기부터 호주에 토끼는 존재했었는데, 이 토끼들은 인간의 통제하에 있었고 생태계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그러나, 저 백인이 들여온 24마리의 토끼들중 일부는 자유를 찾아서 농장 밖으로 탈출 하는데 성공하였는데 이것이 결국 큰 화를 불러 왔다.
페스트라고 명명될정도로 심각했던 토끼의 재앙(100억마리로 늘어난 토끼 이동으로 호주의 농경지는 물론 산림까지 초토화)
호주 정부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6년만에 점액종 바이러스에 내성이 있는 토끼들이 등장하면서 다시 예전 개체수로 돌아갔음
익살스러운 표정의 에뮤
2.에뮤전쟁
1차대전 직후 퇴역한 군인들의 사회적 문제 때문에 호주정부는 퇴역군인들로 하여금 서부지역에서 밀농사를 하도록 정책을 시행
5천명 이상의 퇴역군인들이 호주 서부지역으로 이주해 넓은 초원 지대에 밀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그러나 1930년대초 호주 서부에 서식하고 있던 거대조류 에뮤무리(약 2만마리)가 밀밭으로 침입하기 시작, 서부지역 일대의 밀밭을
완전히 초토화 시키는 일이 발생하게 되었다.
농장주인들은 처음에 장벽을 설치했으나 에뮤의 대군 앞에서는 무용지물이 었고 심지어 이러한 장벽들의 파손으로 토끼들까지 유입되면서
호주서부지역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1932년 호주정부는 루이스 기관총팀을 파견, 기관총 2정과 탄약 1만발을 지원했고, 5천명정도 되는 농장주들도 에뮤사냥에 나섰으나
결국 한달만에 사냥 실패를 선언(986마리사살), 기관총팀은 철수하게 되었고 호주정부는 희귀동물을 학살하는 정부로 비난을 받게 되면서
농장주들의 대규모 병력 요청을 묵살하게 되었고, 이후 에뮤 사냥은 종결되었다.
이후 밀곡창 지대를 휩쓴 에뮤무리는 밀농장에서 더이상 먹을게 없자 다시 초원지대로 유유히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