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에서 폭탄이 터졌다
1920년 8월 3일 오후 9시 30분
일본 제국주의 식민 통치의 제2의 심장
평양을 노렸던 충격적인 사건
"감히 이곳, 평양에 폭탄을 던져!?
망할 독립운동가 조센징 놈들 싹 잡아들여!!"
평양에서의 폭음이라니
전례 없던 이 위협적인 사건은 일제를 당황에 빠지게 하기 충분했다
당황한 일제, 신속하게 대대적인 수색을 펼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범인은
일제의 눈을 피해 종적을 감춘 뒤었기에
그들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그렇게 일제의 수색은 무려 수 개월이나 이어졌다
그러나 일제의 추적은 지독했다
결국 사건 발생 몇 개월 후
끝내 범인 중 한 명을 체포하는 데 성공했다
놀랍게도, 일제 스스로도 믿기 어려웠던 범인의 정체는
가녀린 여성
그런데 그들의 눈을 의심스럽게 만들었던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녀가 안고 있는 생후 12일 된 아기
이는 폭탄 사건이 일어났던 수 개월 전엔
그녀가 5개월 된 아기를 품고있던 임산부였다는 것을 의미했기에
일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평양 전체를 뒤집어 놓았던 자가 임산부라니
일제의 입장에서는 도무지 믿기 힘든 상황이었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그녀는 독립운동가 안경신 의사였다
당시 서른 셋이었던 그녀는
여성 독립운동가로선 드물게도
강력한 무력 투쟁만이 독립을 위한 길이라고 굳건히 믿었다
"생각하건대 일제 놈들을 섬나라로 철수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무력 응징뿐이다."
그녀는 여느 독립운동가보다도 강하게
일제를 향한 무력 투쟁을 주장했던 철의 여인이었다
하지만
자식 앞에선 여느 어머니와 다르지 않았던 여인
임신한 몸으로 폭탄 투척이라는
위험천만한 일을 해냈던 그녀가 밝힌 의거 이유
"아이에게 독립한 나라를 선물하고 싶었다."
태어날 자식을 위해 치마 속에 폭탄을 품었던 그녀였다
조선을 방문하는 미국의회 시찰단에게
조선의 독립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임시정부 주도로 계획됐던
'서울, 평양, 신의주 폭탄 투척 작전.'
이를 위해 평양에 간 5인의 독립운동가 사이에는
임산부였던 안경신 의사가 있었다
5인 3조로 나뉘어 평양에 있던 3곳의 건물에 폭탄을 던졌지만
안경신 의사가 던졌던 곳에서만 폭파에 성공한다
비록 한 곳이었지만 본래의 목적을 고려한다면 대성공이었다
(그들은 평양경찰서, 평양부청, 평남도청에 폭탄을 던졌고
평양부청(사진)에서만 폭파에 성공한다.)
그리고 이어진 도주
의거 직후 일제의 추격을 피해
급히 모두 그곳에서 멀리 피하는 데 성공하지만
안경신 의사는 아이를 밴 상태였기에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결국 홀로 도주하다가
근처 참외밭에 숨어 숨죽인 채
구사일생으로 일제의 추격을 피한다.
그녀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튿날, 두 곳에서의 실패를 만회하고자
이번엔 혼자의 몸으로
폭탄을 다시 던질 것을 결심한 안 의사
하지만 이미 삼엄해진 일제의 경비
실행은 불가했다
분한 마음을 삭이며 어쩔 수 없이 몸을 옮겼다
그렇게 수 개월 후
아이를 무사히 출산하고 12일가량 지났을 때였다
일제의 추적은 끈질겼다
일제는 불시에 그녀의 은신처를 급습하고
그녀를 피체(체포)했다
결국, 불과 생후 12일
핏덩이 아기와 함께 연행된 그녀
공범을 밝히기 위해 이어진 고문
길고 긴 재판이 이어졌고 끝내 사형이 선고됐다
그녀는 그 오랜 시간 동안 아이와
구치소에서 처첨한 생활을 이어갔다
다행히 임시정부의 탄원으로 사형은 면할 수 있었지만
10년 형을 선고 받았고
아이와 이별한 채 옥살이를 시작한 안경신 의사
그렇게 그녀의 첫 번째 시련은 시작됐다
3개월 후, 그녀에게 들이닥친 두 번째 시련
어머니의 사망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슬펐다
하지만 그녀는 오직 아기를 생각하며, 버티고 또 버텼다
홀로 남겨진 채 어미 품을 벗어나 울고 있을 핏덩이
그 아이만을 생각하며 버틴 8년의 옥살이
가석방 된 그녀는 그렇게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만난 아기는 눈이 멀어 있었다
생후 옥살이로 인해 제대로 보살피지 못해 일어난 참혹한 결과
그렇게 그녀에게 닥쳤던 세 번째 시련이었다
어머니의 죽음
눈이 멀어 버린 아기
어느 하나 그녀를 고통스럽게 만들지 않는 것은 없었지만, 그녀는 말했다
자신을 가장 비참하게 만들었던 것은
자신에게 닥쳤던 네 번째 시련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자식은 바보이니 어느 것이 괴롭지 않겠냐마는
동지의 죽음을 듣고 모든 것이 원수같아 보였습니다."
-출옥 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
출옥 후 전해 들은 함께 의거를 결행했던 동지(장덕진)의 죽음
한 여인에겐 너무나 가혹했던 나날의 연속
(그녀의 동지였던 장 의사는 독립운동 중 중국인에게 저격당해 순국)
이것이 우리가 알 수 있는 그녀의 마지막이었다
이를 끝으로 그 어떤 기록에서도 다시 나타나지 않는 그녀의 이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생을 마감했는지
하나뿐이었던 핏줄은 어떻게 됐는지
아무 것도 알려진 것은 없다
그저 그녀가 겪었던 참혹했던 기억만이 전해질 뿐이다
동시에 1962년 그녀에게 수여된 훈장만이
54년이 지난 지금도 주인을 기다리며
어느 수납고 깊숙한 곳에 숨쉬고 있을 뿐
비록 역사는 그녀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나라를 위해 희생하며 온갖 시련을 홀로 맞닥뜨려야만 했던
그녀와 그녀가 받았던 그 고통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하지만 우리는 그녀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아이에게 독립을 선물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던 그녀
그 선물을 받은 이는 바로 우리이며 우리가 곧 그녀의 수많은 아이들이었다
그렇기에 절대 잊어서는 안될 이름이다
안경신 의사가 언제 어떻게 생을 마감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지금
그의 이름마저 우리가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녀는 영원히 지워질지도 모른다
단, 세 글자, 안경신(1888~??)
그 이름이 새겨진 주인 잃은 훈장이
하루 빨리 주인의 품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