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은 우습다 유치하다 한들
나는 믿는다
영원한 영혼을, 죽음 너머 그곳을.
그렇다고 믿자.
내가 늙고
어느덧 잔디를 덮어 눕고
당신이 있는 그곳에 가거든
한 번 심장이 터져라 껴안아라도 보게.
나 너무 힘들었다고 가슴팍에 파묻혀 울어라도 보게.
/ 서덕준, 천국
내가 어렸을 때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시골의 어느 공원 묘지에 묻혔다.
이듬해 나는 방학을 이용해서 그 근처의 친척집엘 갔다.
우리가 탄 차가 할머니가 잠들어 계시는 묘지 입구를 지날 때였다.
할아버지와 나는 뒷자석에 함께 앉아있었는데,
할아버지는 우리가 아무도 안 보는 줄 아셨는지
창문에 얼굴을 대시고 우리들 눈에 띄지 않게 가만히 손을 흔드셨다.
그때 나는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처음 깨달았다.
/ 이정하, 참 사랑의 모습
젖은 티슈 한 통 다 말아내도록
속수무책 가라앉는 몸을 번갈아 눌러대던 인턴들도 마침내 손들고
산소호흡기를 떼어내려는 순간,
스무 살 막내 동생이 제 누나 손 잡고
속삭였다.
"누나, 사랑해!"
사랑이라는 말,
메아리쳐 어디에 닿았던 것일까
식은 몸이 움찔,
믿기지 않아 한 번 더 속삭이니 계기판 파란 눈금이 불쑥 솟구친다.
죽었는데,
시트를 끌어당겨 덮으려는데,
파란 눈금이 새파랗게 다시 치솟는 것이다.
/ 장옥관, 귀
말기 췌장암 선고를 받고도
괜찮타, 내사 마, 살만큼 살았데이.
돌아앉아 안경 한 번 쓰윽 닦으시고는 디스 담배 피워 물던 아버지,
병원에 입원하신 뒤 항암 치료도 거부하고 모르핀만, 모르핀만 맞으셨는데
간성 혼수에 빠질 때는 링거 줄을 뽑아 던지며 살려달라고, 서울 큰 병원에 옮겨 달라고 울부짖으셨는데,
한 달 반 만에 참나무 둥치 같은 몸이 새뼈마냥 삭아 내렸는데,
어느날 모처럼 죽 한 그릇 다 비우시더니, 남몰래 내려갔다 오시더니 손짓으로 날 불러,
젖은 침대 시트 밑에서 더듬더듬 무얼 하나 꺼내 주시는 거였다.
장례비가 든 적금 통장이었다.
겉장이 나달나달했다.
/ 전동균, 겉장이 나달나달했다
그해엔 왜 그토록 엄청난 눈이 나리었는지, 그 겨울이 다 갈 무렵 수은주 밑으로 새파랗게 곤두박질치며 우르르 몰려가던 폭설.
그때까지 나는 사람이 왜 없어지는지 또한 왜 돌아오지 않는지 알지 못하였다.
한낮의 눈보라는 자꾸만 가난 주위로 뭉쳤지만 밤이면 공중 여기저기에 빛나는 얼음 조각들이 박혀 있었다.
어른들은 입을 벌리고 잠을 잤다.
아이들은 있는 힘 다해 높은음자리로 뛰어 올라가고
그날 밤 삼촌의 마른 기침은 가장 낮은 음계로 가라앉아 다시는 악보 위로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 밤을 하얗게 새우며 생철 실로폰을 두드리던 기억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 기형도, 삼촌의 죽음-겨울 판화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