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출 예약
호출 내역
추천 내역
신고
  1주일 보지 않기 
카카오톡 공유
https://instiz.net/pt/4392496주소 복사
공지가 닫혀있어요 l 열기
모바일 (밤모드 이용시)
댓글
기억속에빈칸ll조회 473l
이 글은 8년 전 (2017/2/08) 게시물이에요

http://blog.naver.com/lifeisntcool/220926757112

제57회 칸 국제영화제를 취재하러 프랑스 칸에 올 때, 개인적으로 가장 보고 싶었던 작품은 일본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아무도 모른다’(Nobody Knows)와 홍콩 감독 왕가위의 ‘2046’이었습니다. 런데 ‘2046’은 국내에서 상영될 예정임을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모른다’의 국내 개봉 여부는 그야말로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기에 더욱 보고 싶었지요.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국제적으로 명성이 높은 감독은 아니지만 국내에도 소개된 ‘원더풀 라이프’를 비롯, ‘환상의 빛’이나 ‘디스턴스’ 등 그의 모든 작품들이 저를 사로잡았기에 신작이 너무도 궁금했던 거지요.

 

그러나 개막 후 3일째 현지에 도착하는 바람에 이 영화의 공식 상영 일정을 모두 놓쳐버렸습니다. 경쟁부문 출품작 중 가장 먼저 상영 스케줄이 잡혀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이 영화를 본 몇몇 사람들로부터 멋진 영화라는 말을 들으니 더욱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그러다 며칠 뒤 영화제와 함께 열리는 칸 영화 마켓에서 이 작품의 시사회가 한 차례 더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마켓 시사는 공식 상영과는 달리 30~50석 규모의 작은 상영관에서 열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그래서 상영 시작 1시간 전에 일찌감치 극장 앞으로 가서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마켓 시사였다는 점이었습니다. 해외에 판권을 팔기 위한 목적의 상영이기에 바이어 아이디 카드를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우선적인 볼 권리가 있었던 거지요. 전 분명히 상당히 앞쪽에서 기다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온 바이어들이 먼저 입장하기 시작했고, 기자 아이디 카드를 들고 있던 제 마음은 점점 조급해졌습니다.

 

이승환의 노래 가사처럼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어서, 결국 바이어들만으로 좌석이 다 차버리고 말았습니다. 출입을 통제하는 사람은 “만원이니 돌아가달라”고 사무적으로 말하더군요. 입에서 한숨이 절로 나오며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데, 함께 기다리던 다른 사람들은 모두들 포기하고 발길을 돌려버리더군요. 잠시 망연자실, 넋을 놓고 있다가 그냥 그대로 기다리기로 결심했습니다. 닫힌 상영관 문 앞에서, 저 혼자 말이지요. 그곳 직원이 “왜 기다리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혹시 이 영화를 보다가 도중에 나오는 사람이 있으면 대신 들어갈 수는 있을 것 아닌가”라고 답했습니다. 그는 그냥 싱긋 웃고 말더군요.

 

영화가 돌아가는 소리가 문 밖으로 조금씩 들리면서 더욱 안타까워졌지만, 무작정 기다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처음엔 시큰둥하던 직원도 안쓰러웠는지 이런저런 말을 붙이면서도 정작 들여보내주지는 않더군요. 그렇게 30분이 더 지나자 그는 제게 다가와 “바닥에 앉아서 보겠다면 지금 들어가도 좋다”고 했습니다. “네 맘 다 이해한다”는, 어린 조카를 보는 큰 삼촌 같은 표정으로 말이지요.

 

너무 기뻐서 가슴까지 두근거려가며 들어가 바닥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주위를 살펴보니 꽤 느리게 진행되는 그 영화를 보며 조는 사람들이 몇 명 눈에 띄더군요. 과장을 좀 보태서 말한다면, 순간적으로 격심한 분노를 느꼈습니다. 이 영화가 너무 보고 싶은데도 볼 수 없어서 밖에서 1시간30분을 기다렸는데, 누군 뒤늦게 들어와서 그 귀한 자리를 차지한 채 졸고 있다니요. 그로부터 10분 쯤 더 지났을 때부터 하나씩 극장을 나서는 사람들을 볼 때도 무척 화가 나더군요.

 

영화요? 결국 2시간20분짜리 러닝 타임 중 20% 이상을 놓쳤지만, 너무 좋았습니다. 아버지가 전부 다른 어린 네 남매가 어머니로부터 버려진 채 좁고 지저분한 아파트에서 살아내는 과정을 담은 ‘아무도 몰라’는 제가 지난 2-3년간 본 영화 중 가장 슬픈 작품이었습니다. 자막이 끝까지 다 올라간 후, 곧이어 열리는 어느 기자회견에 참석하기 위해 서둘러 걸음을 옮기던 저는 가슴 한 구석이 흡족하게 차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만일 사후에 영화의 신(神)이 다스리는 나라가 있어서 제가 그곳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바로 오늘 일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가슴 졸이고 짜증내고 슬퍼하고 뿌듯해했던 그 몇시간의 유치함이 제겐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의 존재증명 같았다는 거지요. “나는 아직 영화를 사랑하고 있구나”하는 새삼스런 안도감이라고나 할까요. 어쩌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언제나 유치한 것들인지도 모릅니다.


일년에 수백편씩 보아내는 일을 십여년 가까이 하고 있는 영화 기자로서, 앞으로도 저는 영화에 대한 처음 사랑을 종종 잊어가며 가끔씩 매너리즘의 위험 앞에서 휘청대겠지요. 하지만 이날의 경험은 그때마다 제가 영화에 대한 사랑을 다시 길어올릴 수 있는 넉넉한 우물 하나가 될 것 같습니다. 영화가 있어서 행복한 날이었습니다.




 
로그인 후 댓글을 달아보세요
 

혹시 지금 한국이 아니신가요!?
여행 l 외국어 l 해외거주 l 해외드라마
카테고리
  1 / 3   키보드
닉네임날짜조회
이슈·소식 좀 기괴하다는 에겐테토 밈 작가 최근 인스스.JPG120 우우아아07.08 22:4977901 3
유머·감동 초딩이 차 긁어 놓고 이렇게 해두고 감.jpg93 요리할수있어0:5358583 0
이슈·소식 🔞노골적인 코드로 난리났었던 속옷 캠페인 (후방)188 우우아아07.08 21:1595470 14
이슈·소식 전북 소상공인 코스트코 익산점 결사 반대89 유알포미07.08 19:1865719 0
이슈·소식 [단독] 잡코리아·알바몬 개인정보 다크웹 판매 정황…비밀번호 포함74 사건의 지평선..07.08 20:3858652 0
한국 더위에 충격받은 외국인 관광객 라디오스타 11:44 79 0
카더가든 멜로망스 발굴한 문화재단의 이번 뮤지션 라인업 .jpg 토마토가되 11:27 720 0
한 단어만으로 튀르키예 사람 긁는 법3 단고랑이 11:13 4167 0
김구 선생님도 이건좀...하고 있을거 같은 <케이팝데몬헌터스> 최근 인기..8 콩순이!인형 10:58 7938 5
양동근이 배우로서 매너리즘에 빠지게 된 계기1 망그리곰 10:49 3944 0
옆집 집들이 연속3일 논란.jpg5 가리김 9:43 11427 1
케데헌 진우와 루미가 뽀뽀를 안해준게 정말 고마웠다22 Tony.. 9:23 12386 6
케이팝 데몬헌터스 조이의 불편한 진실12 윤정부 9:00 17702 0
취업성공했는데 화장실이 이렇다면 다님? He 9:00 1886 0
한식뷔페에서 많이 먹었다고 꼽먹음4 사건의 지평선.. 8:49 8777 0
현장서 일했던 막내가 보고 싶습니다.jpg19 가리김 7:28 22487 30
길고양이 같이 이사 가고 싶으면 이삿날 나오라고 했더니 .jpg119 엔톤 6:25 28632
서울 사람들 놀라는 타지역 지하철 출근길 하품하는햄스터 6:05 14605 0
GS 흑임자 빵......2 하야야 탄핵날 5:50 14440 0
내 발 만지지마아아아아아아아ㅏ아아ㅏ아아 위플래시 5:40 3517 0
영화 리틀포레스트에 나왔던 강아지 오구 근황.jpg8 NCT 지.. 5:38 12066 0
독서실에서 누가 쿠키 계속 먹길래 그만드세요 했더니14 기후동행 5:22 41198 6
뭔데 내가 사와야 되나 NCT 지.. 4:53 1582 0
맘카페 회원들이 좋아하는 뻘댓글1 누가착한앤지 4:15 2112 0
X소리를 믿는 이유 키토푸딩 2:21 2061 1
추천 픽션 ✍️
thumbnail image
by 한도윤
울고 싶었고 퇴사하고 싶었고 그러다 모든 걸 그만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나는 퇴사하지 않았다.도대체 꿈이 뭐라고.나는 아이폰 메모장에 꽤나 다양한 이야기를 적었다. 스트레스로 몸이 이상반응을 보이고 우울증 초기 증상들이 보이면..
thumbnail image
by 작가재민
여름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다는 걸 너는 느끼고 있니?봄비가 수차례 내리고 그 물을 머금은 나무들은 더 진한 초록색이 되었어. 아침에 일어나면 어둑어둑했던 시간은 눈을 뜨면 햇빛이 따스하게 들어오는 시간으로 변했어.매일 지나치는 초등학교..
thumbnail image
by 한도윤
아침 출근길에 엄마와 통화를 하면서 걸어가는데 문득 울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차마 엄마께는 말씀드리지 못했다. 당신도 만약 그렇다면, 그랬었다면, 그럴 것 같다면 이 글에 잘 찾아오셨다. 왜냐면 나도 그런 상황이기 때문이다.출근길에 울..
thumbnail image
by 작가재민
세상에 너에게 맞는 틈이 있을 거야자리를 찾아가는 게 인생의 여정이니까.세상에는 많은 틈이 존재해. 서울의 빽빽한 건물 사이, 시골의 논밭과 논밭 사이, 산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 바다와 강물 사이. 그중 하나는 꼭 너의 모양에 맞는 틈..
thumbnail image
by 한도윤
‘이쯤이면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 누구나 한 번쯤 해봤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결심은 언제나 어렵다. 그건 회사를 다니는 모든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일과 삶을 저울질하고,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을 비교하고, 안정적..
thumbnail image
by 작가재민
너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했지. 학교를 다닐 때부터, 직장생활을 시작하고서부터, 나랑 만나면서부터, 어쩌면 태어날 때부터 너는 갖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거, 이루고 싶은 게 많다고 했어. 꿈이 큰 사람. 그게 너의 매력이라 내가 너..
이슈
일상
연예
드영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