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국 2012년 찬조 연설에서.
'제가 문재인이란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1990년대 초반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햇병아리 교수로 울산대에 있었습니다. 연구와 강의에 전념했던 시절, 많은 논문을 써야했고, 변론서와 판결문들을 꼼꼼히 읽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읽는 수많은 공익 인권 사건마다 계속 등장하는 이름이 있었습니다.
바로 변호사 문재인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부산지역은 물론, 울산, 창원 등 경상남북도까지 아울러 거의 대부분 공익 인권사건을 맡고 있었습니다.'
문재인 부산경남지역 노동운동했을때 20년동안 지켜본 사람이 쓴 글
설동일 (부산 혁신과 통합 상임대표)
부산경남지역 노동운동의 말석에서 변호사님과 20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 보내며 속속들이 사정을 아는 필자가 여기서 밝히거니와, 문 변호사님이 80~90년대 부산경남지역의 노동운동에 헌신한 공로는 참으로 컸다. 특히 당시의 부울경 지역에서 발생한 주요한 노동관련 소송의 대부분을 도맡아 처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3년 부산민주공원에서 정리한 권당 300P 전후 10권 분량의 부산지법, 부산고법 노동사건 판례모음집을 보면 집단적 노사관계 관련 소송이나 개별적 노사관계 사건 중 해고 관련 소송은 문 변호사님이 대부분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웅변하고 있다.
이렇게 80~90년대 부산경남지역 노동관련 소송을 혼자 도맡아 했으니 돈을 많이 벌었겠지, 라고 사람들은 오해할 수도 있을 테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해고 관련 소송의 경우 당사자의 사정이 어렵다 보니 외상이 많았고 수임료도 거의 필요 경비 정도에 불과했다. 그리고 산업재해 관련 소송과는 달리 승소율도 그다지 높지 않았다. 또한 노동쟁의 사건의 경우에는 소송당사자도 많고 검토해야 할 관련 기록도 엄청 많았으나 수임료는 염가였고 승소율 또한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문 변호사님은 오직 노동운동에 대한 애정과 책임으로 이 모든 소송을 맡은 것이었다.
1.
2.
그리고
부산의 신발공장 재봉사 김성연 아주머니가 말하는 문재인 변호사.txt
저는 부산에 사는 김성연이라고 합니다. 저는 부산에 있는 신발회사에서 재봉사로 일합니다.
열 네 살 때부터 죽어라 신발 재봉질만 37년 입니다.
제가 문재인 변호사님을 만난 것은 1988년 쯤 될 겁니다.
처음 다니던 신발공장에서 좀 더 나은 자리 구해보자 싶어서 공장을 옮겼을 때 였습니다.
낮에도 쥐들이 재봉틀 밑을 왔다갔다하고, 화장실 칸막이도 없었습니다.
목표를 못 채우면 무급 연장근무에, 철야에... 월급도 월급이지만 참 못 살겠데예. 그래서 회사에 요구했습니다.
"점심때 밥 좀 편하게 먹게 해주라"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잠 좀 자게 해주라"
"쥐 좀 잡아주라, 화장실 칸막이 좀 맨들어주라"
그러더니 우리한테 데모한다고, 주동자를 색출한다고 끌고 가대요.
아무리 억울하다, 외쳐도 누구 하나 들어주질 않대요. 무작정 문 변호사님을 찾아갔습니다.
법정에서는 우리 문재인 변호사님이 판사님께 이리 말씀하시데요.
"저 친구들, 저 고운 손톱에 바늘이 꽂히고, 밥 먹을 시간이 없어 굶어야 되는데, 저 어린 친구들의 심정을 아십니까. 저 표정들 한 번 봐주세요. 판사님! 똑똑히 봐주세요. 판사님!"
눈물이 나오대요.
저만이 아니고 같이 간 사람들 다 울었습니다.
그렇게 도와주셔서 잡혀갔던 동료들이 풀려나고 그때부터 문재인은 우리 문재인, 우리 변호사님이 됐습니다.
22년 동안이나 부산에서 저처럼 힘없고 억울한 사람들을 위해 일하셨습니다.
부산 뿐 만 아니라 울산, 창원까지 돌아다니시면서 저같은 사람들 변호를 해주셨습니다.
한번은, 92미터짜리 크레인 위에서 농성중인 노동자들을 만나러, 직접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시기도 했답니다.
30층 높이랍니다. 그 높은 데를 겁도 없이 사다리를 타고 우리 같은 사람들 사연을 들으러 올라가신 거 아닙니까?
어떤 친구가 그러대요 "돈 많이 벌었겠다"
그라면 저는 이랍니다. "그게 돈 버는 일이가! 우리도 10원도 안냈는데" ... 진짭니다.
사실 그때는 돈 드려야 되는 줄도 몰랐습니다. 돈 달라는 전화도 없었습니다.
우리들한테 유일한 '빽'이 되어준 분입니다. 돈 있고 권세 있는 사람들만 잘 사는 세상 말고 우리 같이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도 함께 다 잘 사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저 같은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일하던 우리 문재인 변호사가, 이제는 온 국민을 위해 일하는, 대통령이 되는 걸보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3.
“노무현과 문재인, 두 분만이 희망이었죠”
신귀영 간첩단 사건…국가배상금 모아 1천만원 기부신귀영 등 피해자들은 지난 3월 25일 부산고법으로부터 1980년 간첩혐의로 15년형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가 2009년 8월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후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항소심)에서 “피고인 대한민국 정부는 원고들에게 손해배상금을 지급하라”고 판결받았습니다.
신귀영씨는 “너무 늦었지만 결실이 나와 눈물이 흘렀다”며 “과거사위원회 조사관들과 특히 1994년 처음 이 사건을 맡아 사비로 일본에 가서 자료수집을 하는 등 헌신한 문재인 변호사께 감사하다”고 전했습니다.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한 故 서성칠씨를 대신해 가장이 된 장녀 서성실씨도 “대법원도 기각한 사건을 재심 청구할 기회를 준 건 참여정부에서 제정한 특별법 덕분”이라며 “노무현, 문재인 두 분이 우리에게 유일한 희망이었다”며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신귀영 간첩단' 조작사건
이른바 ‘신귀영 간첩단 사건’으로 세간에 알려진 이 비극은 1980년 2월 하순 외항선원이던 신귀영씨 등 일가족이 부산경찰국 대공분실 수사관들에 의해 강제연행 돼 구속되면서 비롯됐습니다. 이들에게 적용된 혐의는 “재일 동포에게 돈을 받고 국가기밀을 넘겼다”는 것이었고 당시 경찰들로부터 물고문과 전기고문, 무차별 구타를 당한 끝에 허위로 간첩혐의를 인정했습니다.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혐의가 적용된 이들은 1981년 6월 대법원에서 신귀영씨와 신씨의 사촌 여동생 남편인 서성칠씨는 징역 15년, 신씨의 당숙 신춘석씨는 징역 10년, 신씨의 친형인 신복영씨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이 각각 확정됐습니다,
故 서성칠씨는 1990년 옥중에서 세상을 떠났고 친형인 故 신복영씨도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다 2000년 사망하는 등 정권안보를 위한 국가 공권력의 만행으로 부산 기장에서 평화롭게 살던 일가족이 풍비박산된 비극을 겪었습니다.
"억울한 사람들의 길을 열기 위해"
1994년에 만기 출소한 신귀영씨에게 먼저 따스한 손길을 내민 건 천주교인권위원회, 이들의 억울한 사연을 들은 천주교인권위원회는 당시 부산경남지역 시국사건을 전담하다시피 하던 문재인 변호사를 소개했습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재야 정치인으로 활동하고 있을 때입니다.
1994년과 1997년 두 차례 법원에 재심을 청구해 하급심에서는 받아들여 졌지만 유죄를 뒤집을 만한 새로운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상급법원에서 잇따라 기각됐습니다. 더 이상 희망을 가질 여지가 없었습니다.
당시 상황은 최근 출간된 <문재인의 운명>에 기술되어 있습니다.
"판결문과 대책위가 조사한 자료만 훑어도 조작된 사건임이 분명했다. 그때만 해도 그런 사건에 대해 재심청구가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시기였다"며 "그런 만큼 재심성공 사례를 만들어 내야 다른 억울한 사람들도 길이 열릴 것이라고 생각해 사건을 맡았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재심사유를 다르게 구성해 다시 재심청구를 하기로 했다. 새로운 재심사유를 확보하기 위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이 소송에서 과거 간첩사건 재판 때 간첩 행위를 목격했다고 증언했던 증인을 소환했다.
그는 그 증언이 고문에 못이긴 위증이었다고 실토했다. 이를 근거로 2차 재심청구를 한 것이 99년 7월이었다. 이번에도 부산지법은 재심개시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부산고법이 검찰의 항고를 받아들여 재심개시결정을 취소했다."
피해자들은 "너무나 억울했지만 더 이상 소송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고 당시 심경을 전합니다. 서성실씨는 "그러나 사비를 들여 자료를 수집하는 등 사건에 매달린 문재인 변호사 때문이라도 희망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고 회고합니다.
‘과거사 위원회’의 출범
참여정부가 들어서고 2005년 국회에서 여야 합의를 거쳐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특별법이 제정되고,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과거사 위원회)가 발족하면서 국가공권력에 의해 피해를 본 사건에 대한 조사가 시작됐습니다. 동시에 참여정부 들어 경찰청이 자체 구성한 과거사위원회에서도 여러 사건 관련 기록 등을 찾아내 국가권력의 여러 불법성을 확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노 대통령이 보수세력의 강한 반발에도 '과거사위원회' 설립을 추진한 것은 국가가 저지른 불법적 활동에 대해 사과에만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그 아픔을 안으려는 조치였습니다.
신귀영씨 일가가 당한 억울한 누명도 문재인 변호사의 의지와 함께 과거사위원회 조사관들의 성실한 활동 덕에 풀 수 있었습니다. 신귀영씨는 "과거사위원회 조사관들이 고문을 가한 형사가 법정에서 증언할 수 있게 많이 찾아가 설득했다"고 고마움을 표했습니다.
2009년 2월 과거사위원회는 신귀영 일가족 사건이 조작됐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를 근거로 세 번째 재심을 청구했습니다. 그해 8월 법원은 가해 형사의 고문조작 증언과 증거 불충분을 근거로 무죄판결을 내렸습니다.
재판부는 “국가기관이 자행한 불법 구금과 고문으로 피고인들이 필설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의 고통을 받은 데 대해 만시지탄이지만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밝혔습니다.
신귀영 간첩사건 29년만에 무죄 http://news20.busan.com/controller/newsController.jsp?newsId=20090822000030
"간첩 누명 벗은 신귀영 씨 일가에 37억 배상" http://news20.busan.com/controller/newsController.jsp?newsId=20110325000090
4.
그리고 또 거짓뉴스로 문재인이 유병언 파산 관재인이였다고 거짓 네거티브 하니까
문재인은 유병언 일가한테 돈 받는거 도와준 변호사 라고 자신을 도와줬다고 페북 올린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