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의 내 나이는 20살.
그리고 그때의 그 아이는 18살이었습니다.
건너 엄마가 계모임에서 아는 분의 아는 분을
소개 받아 ‘우리 아들이 수학이 딸려서’ 라고
하시기에 나는 과외를 그 아이의 과외 선생님이
되었는데
첫인상은 과연 이 애가 열심히
나를 따라와 줄까? 였지요.
딱 붙게 줄여 입은 교복에 언뜻
젤이나 왁스로 손질 한 것 같은...
머리에 넉살좋게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건네던 얼굴에서
왠지 모르게
공부에는 별 관심 없이
부모님 강요로 과외를 하게 된..
아이라는 인상이 들었기 때문이었죠,
물론 그것은 철저한 나의 편견이었고
그 아이는 제법 전교권에서 노는
아이었다는 걸 얼마 안가 알게 되었습니다.
늘 착실히 수업을 따라오고
내주는 과제도 꼬박 해오고 질문도 곧잘
하며 가르치는 즐거움을 주던 아이는
본인 역시 수학 성적이 점점 오르는
즐거움을 맛보며 기특하게도 고3이 되어
수능을 볼 때까지, 제가 과외를 계속 할
수 있도록 해주었지요.
(보통 몇 달 이내 아이의 성적이 오르지
않으면 과외를 잘리기도 하니까요)
종종 이번에 수학 시험 잘 보면
영화를 보여 달라는 둥, 소원을
들어달라는 둥 장난을 치기도 하고
수학여행을 가서는 선물이라며
돌고래 열쇠고리와 감귤 비누를 사다 준
고마운 아이.
실제로 한번은 수학 시험을 100점을
맞아와 제가 영화 인어공주를 보여준
기억도 있었습니다..
여튼 그렇게 2년여가 지나고 그 아이는
수능을 보고, 저는 더 이상 그 아이의
수학 과외 선생님이 아니게 되었죠.
마지막 과외를 하고 수능을 잘 보라고
준비한 초콜렛 선물을 주고...
어머님과 마지막 인사를 하고
수능 보고나서 어떻게 됐는지
연락 달라며 아이와 이야기를 하고
뭐 그랬던 마지막 과외 날의 기억.
그러면서 종종 문자나 통화를
주고받았습니다.
점수가 어떻게 나왔다.
어디 어디를 써보려 한다.
먼저 대학에 간 선배로써 이런저런
조언이나 원서 접수에 관련된
이야기들을 나누고...
다시 그 아이를 직접 얼굴 보고
만나게 된 것은 그 아이가
저와 같은 학교의 합격 통보를
받았다고 한 날이었습니다.
싱글벙글한 얼굴로 쌤 후배 되써요~
하고 웃던 얼굴에
XX (더 위인 상위권 학교) 떨어져
죽상일 줄 알았더니 라고 하니
이 학교 다니는 쌤이 가르쳤으니
저도 이 학교 갈 수준인거죠 거긴
무리였어요 애초에. 라며 쿨하게 웃더군요.
그러면서
이젠 “쌤” 아니고 “선배” 라고
후배로써 잘 부탁한다며 앞으론
선배라고 부르겠노라 하더군요.
과가 달랐지만 입학 후
같이 점심을 먹는 다던가, 공강에
도서관에서 같이 공부를 하게 된다던가
같은 교양 수업을 들으며....
자주 얼굴을 보게 되었지요.
생각해보니 늘 먼저 연락을 해 온 쪽은
그 아이였습니다.
선배 공강이죠? 저 도서관 자리
맡아놨어요.
선배 저 오늘 점심 혼자 먹어야 돼요 ㅠㅠ
뭐 이런 연락들이었죠.
교양 뭘 들을 거냐며 아 그럼 저도
그거 들을래요 그러면서 저를 따라
수강 신청을 하던 것도 그 당시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4학년이 되었고
그 아이는 1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갔습니다.
가끔 콜렉트콜로 전화가 왔죠.
시덥잖은 시시콜콜한 대화들을 나누고
넌 언제 제대하니? 놀리고...
또 제가 집안 청소를 하다가
어디서 사은품으로 돌린 것 같은...
회사 이름이 인쇄되어 있는 전화카드
뭉치를 발견하여 보내 준 적도 있었습니다.
(이 당시만 해도 전화 카드가 쓰일 당시였죠)
가끔 휴가를 나오면 영 적응 되지 않는
까까머리를 보며 같이 밥을 먹거나 커피를
마시기도 했습니다.
과외 제자는 어느새 친한 아는 동생이
되어있었죠,
한 번 전화가 와 대뜸 보고싶다고
하기에 엄마가 아니라? 하자 그냥
여기 있으니까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다 보고 싶어요. 선배 나 보러 와줘요.
하고 우는 시늉을 하길래
면회를 1번 가주기도 했네요.
치킨과 피자를 싸들고 말이죠 ㅋㅋ
그리고 제대 후. 저는 졸업 후 1년이
넘게 취준생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녀석은 복학생.
서로 노선이 달라 전화나 문자로만
연락을 주고 받고
어쩌다 한 번 얼굴을 보며 살던 나날들.
드디어 제가 취뽀를 하고
그 아이와 축하겸 자리를 해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만나기로 한 식당에 자기 이름으로
예약이 되있으니 먼저 들어가 앉아 있으란
연락에 자리를 잡고 기다리는데...
별안간 케이크 상자에 꽃다발을 들고
나타난 아이...
내가 취업했다고 축하 선물인가 싶어
뭘 이런걸 다 사왔냐고 민망해하자
곧 선배 생일이기도 하잖아요,
웃는데 아 맞다 다음주가 생일었구나.
...
그렇게 밥을 먹고...
케이크에 불을 붙이겠다는 아이에게
부득부득 괜찮다고 민망하다고 말리고...
마음만 받겠다며..
후식으로 나온 냉녹차와 커피를
받아 들고 한 모금 하던 찰나..
불쑥
테이블 위로 작은 네모 상자가
올려 집니다.
뭐야 선물이 또 있었어? 하고 보면
반지 한쌍.....
조금 당황한 기색의 제 얼굴을 보며
그 아이가 말하길
처음 봤을 때부터 제가 좋았다고 합니다.
자기한테 그렇게 환하게 웃어주고
다정했던 사람은 처음이었다고..
첫눈에 반했다는 말을 실감한다고.
하지만 그땐 그 아이가 18살
전 20살.
말도 안되던 시절이었죠.
그래서 꾹 참았대요.
성인이 될 때까지.
같은 학교 가려고 공부 열심히하고
잘 보이고 싶어서 일부러
아는 문제도 모르는 척 질문하고..
그러면서..
그리곤 제가 다니던 학교로
따라 지원하고 교양수업도 따라 듣고
어떻게든 만날 구실 만들어서
관계가 서먹해지거나 흐지부지 되지
않게 하느라 나름 힘들었다고...
군대 가서도 저한테 남자친구가
생기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밤에 잠도 오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 말을 듣는데 뭐랄까 설레고 좋기보단
문득 으응? 나를? 왜? 이런 생각이
먼저 앞서더군요.
당시 저는 25살 평생을 모태솔로로 살면서
제가 생각해도 그다지 이성들에게
어필될만한 조건을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던 터라...
뭐 그래서 이 아이도 너무 철저하게
과외 제자였던 아는 친한 동생
범주에 두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런 고백은 갑작스러운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아이에겐 무려 5년이나
참고 기다려야했던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5년이나 지나 고백을 한 이유에 대해선
처음엔 자신이 미성년자라 참았고
대학 와서는 자기가 군대에 가야 했기 때문에
무턱대고 고백해 저를 고무신 만들고
싶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 이후엔 취업 준비를 하며 고생하는
저에게 덜컥 제 마음만 앞서 고백을 하고
싶지 않았다고...
그래서 제가 취업에 성공했다는
연락을 받는 순간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고
하네요. 아 이젠 고백해도 되겠구나 싶어서.
그런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계속 얼떨떨했습니다.
5년이나 기다렸던 순간이라 조금도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며 부담일 줄은 알겠으나
무턱대고 커플링을 사왔다고.....
그러는 얼굴엔 제법 진지함이 어려 있습니다.
그 말들이 다 정확히 기억나는
것은 아닙니다만...
본인이 말하길
어린 맘에 선생님을 동경하고
좋아하던 단순한 감정이 아닐까 했는데
아니라고 지금도 너무너무너무 좋아서
미칠 것 같다고, 5년이나 고백도 못하면서도
너무 좋았다고.
당장 대답을 강요하는 건 아니라고
했습니다. 제겐 갑작스러운 고백이란 걸
아니 기다리겠다고 했습니다.
거절하면? 그러자 거기까진 생각 안 해봤다며
자기의 인생에 내가 없다는 상상을 18살 그 이후로
해본 적이 없다고.....
집에 가서 가족들하고는 꼭 촛불 하라며
들려준 케이크와 꽃다발을 들고....
집에 가던 그 길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마주 앉아서 그 많은 이야기들을
들을 땐 당황해서 인가 멍하기만 했는데
집에 가는 길 내내 심장이 쿵쿵 대더군요.
집에서 내내 그 아이와의 과거를
더듬어 보았습니다.
아 그때 이래서..
아 그러고 보니...
그제야 그 아이의 지난 모든 행동들과
함께 한 순간 모두에 부여된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제가 더럽게 눈치가
없는 편이었던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포토 문자가 하나 도착을 합니다.
자물쇠가 달린 사물함 번호 사진.
학교 도서관에 있는 그 아이의 사물함
이었습니다.
반지는 여기에 넣어둔다고
자신의 고백을 받아 줄 마음이 있다면
반지를 끼고 학교서 자주 만나던
카페로 나와 달라며 시간이 문자도
적혀있었습니다.
사물함 번호는 말하지 않아도 선배가
가장 잘 알거라는 말도 덧붙여 있었죠.
결과적으로 전 그 반지를 찾아 끼었고
그 카페로 아이를 만나러 갔습니다.
그리고 다시 5년이 지난 지금
저는 그 아이와의 결혼을 앞두고 있습니다.
연애 기간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고
달콤하고 즐거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제가 아는 그 어떤 남자보다도
그 아이는... 아니 제 남자친구는
다정하고 저만을 위해주는 사람이었고
늘 기분 좋은 편안함을 제게 안겨주었죠.
프러포즈 역시 거창하진 않았지만
세상 근사했고.
저는 두 말 없이 그 프러포즈를 승낙했지요.
오늘도 저를 집 앞에 바래다주며
“내가 니꺼가 된다니 믿기지 않아.” 하며
스스로 제 볼을 꼬집어보던 남자친구는...
아직까지도 5년 전의 그 두서없고 갑작스런
고백을 받아 줘 저를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남자로 만들어 준 저에게 고마워합니다.
저 역시 저란 존재에게 찾아 온 이 믿을
수 없는 사랑이 너무 벅차고 새삼 감동스러워
그저 결혼을 앞두고 이런저런 생각들이 많아지면서
풀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 두서없이 글을 써봤어요.
우리 잘 살 수 있겠죠.
남자친구와 함께하면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결혼식이 딱 5일 남았네요.
모두들 행복하고 평안한 밤 되세요~
P.S 학교 사물함 자물쇠의
비밀번호는 제 생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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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내가 다 간질간질 로맨틱 ㅠ
행복하세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