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의 장례식에 다녀왔다.
나는 S와 1년 반의 학보사 생활을 같이 한 동기다.
나와 S는 같이 밤을 새며 기사를 쓰고, 수업을 듣고, 술을 마시던 친구사이였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가까운 곳에 살고도 힘들다는 전화 한 통 편히 할 수 없던 사이였다.
아침에 일어나니 S가 죽었다는 문자가 와있었다. 그것은 매우 농담처럼 여겨졌다. SNS에 접속하니 S가 유서 같은 걸 남긴 것 같았다. 너무 놀라 눈물도 나지 않은 채로 그 글을 읽어 내렸다. 유서도 참 지답게 썼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여전히 죽음은 실감할 수 없었다. 부고를 받았으면서도 아니겠지, 라는 마음이 한 켠에 남아있었다. 계속 스크롤을 내리면서 긴 글을 읽고 있는데 거기에, 미친,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S의 유서에는 고마웠던 친구가 딱 두 명 나오는 데 그 중에 첫 번째가 ^^ 나였던 것이다. 나는 S보다 다섯 살이나 많고, S와 단둘이 논적도 별로 없다. 우리는 성별도 다르고 부서도 다르고 취향도 다르다. (걔는 에이핑크를 좋아하고 나는 f(x)를 좋아한다.) 나는 S가 고등학교 동창들과 제법 친하게 지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심지어 학보사 내에서만 해도 나보다 S와 친한 동갑내기 친구들이 있었다. 나는 S가 좋아 ‘누나라고 부르지 말고 이름으로 불러’라고 늘상 얘기했지만, S는 늙은 내가 부담스러웠던지 매번 손사래쳤다. 자기는 아직 ‘성장기 청소년’이라나 뭐라나.
심지어 S와 단둘이 본 것도 벌써 네 달 전의 일이었다. 걔가 초딩입맛이라 한식을 싫어했기 때문에 우리는 파스타와 피자를 먹으러 갔다. 걘 맨날 녹두에 갇혀있어서 내가 서울대입구역까지는 좀 나오라고 보챘다. 그 여름 우리는 계절학기도 같이 들었다. 교양 수업인데 내가 맨날 안 나가서 걔가 나를 걱정해줬다. 재수강을 하기로 한 나에게 S가 친히 기말고사 족보까지 만들어 보내줬고, 그 마음이 고마워 내가 밥을 사기로 했던 것이다. 사실 그 무렵 나는 S가 세상을 버거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S는 식사를 하면서도 내내 농담을 하고 희망적인 얘기만 했다.
즐겁게 얘기를 하고 가게 문을 나오는데 갑자기 서글퍼져서 눈물이 났다. 걔는 눈치 없이 실실 웃고 있었다. 나보다 덩치가 작은 그 아이의 팔을 살짝 잡고 포옹을 했다. 오히려 S가 내 등을 어설프게 토닥거리며 위로했다. 나는 밤에 울어도 아무도 들어주던 이 없던 나의 스무 살이 생각이 나서 말했다. “힘들면 언제든 전화해. 나 올빼미족이라 밤에도 맨날 깨있고, 우리 집에서 너희 집은 야간할증 붙어도 5천원밖에 안 나오잖아.” 걔는 멋쩍어했고 우리는 헤어졌다.
그 이후로도 S를 안 본 것은 아니었다. S는 조금 쉬더니 한층 더 뽀얘진 피부로 신문사에 나타났다. (사실 그건 비비크림이었지만) 나는 야근에 지쳐 피부가 썩어가던 참이었다. 그는 우연히 친 PEET를 잘 본 것 같다고 우리에게 자랑을 하기도 했다. 오히려 신문사에 있던 기자들이 걔가 너무 부러워 배가 아플 지경이었다. S는 그 날 뻔뻔하게 야식까지 다 먹고 갔다.
그리고 페이스북에는 S의 여행 사진이 자주 올라왔다. 원래도 혼자 뽈뽈 잘 다니던 애였지만 수업 부담도 없으니 더 신난 듯 했다. 걔가 하도 제주도 사진을 많이 올리길래 나도 뽐뿌 받아서 수업을 째고 제주도에 다녀왔다. S가 돌아오는 날에 내가 떠나는 일정이라 굳이 만나자고는 안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때 제주공항에서라도 만나 오렌지가 든 초콜릿을 같이 까먹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아니면 하루 더 남으라고 졸라서 걔 스쿠터를 얻어 타고 바다 구경을 할 수도 있었겠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실제 나는 그러지 않았고, 우리는 그 이후로 볼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어제는 얼마 안 남은 논문 발표를 위해 팀원들을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그러나 온몸이 떨려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유서를 읽고 내 이름을 확인하고는 엉엉 울다가, 조금 정신을 차려 세수를 하고, 고맙게도 나를 걱정해주는 지인들의 전화를 받고, 끊고 나서 또 엉엉 울기를 반복했다. 갑자기 이상한 생존본능이 솟구쳐서 중간에 밥도 먹고,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분리수거도 했다. 짐승처럼 이불 안에 갇혀 있다가 저녁이 되어 장례식에 다녀왔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더 못 있고 나왔다. 동기들과 나는 녹두에서 12시까지 술을 마시다 헤어졌다. 걔가 먹고 싶다던 치킨집도 갔다.
너를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도 너에 대해 쉽게 이야기를 한다. 명문대생이 감사할 줄을 모른다고, 살려는 노오력을 덜 했다고 훈계를 한다. 언론에서는 이때다 싶어 네 죽음을 ‘수저론’이라는 단순한 논리로 환원시킨다. 널리 퍼뜨리고 싶었을 너의 마지막 말이, 사람들에게는 한낱 가십거리로 소비되어 버린다.
심지어 넌 네가 기자일 적에도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기사를 쓴 적이 없었다. 이공계였던 너는 정치, 사회, 외교 분야의 기사를 쓰기 위해 책을 달고 살았다. 과학 분야 기사에서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전문 지식을 뽐내 좋은 평가를 받았다. 기자라는 타이틀이 20살인 네가 감당하기에 버거웠을 텐데도 너는 충분히 잘 해줬지. 정말 고맙다.
아니야. 사실 난 네가 원망스러워. 왜 넌 나에게 전화 한 통 하지 않았니? 나는 네 삶을 속단할 권리는 없지만 네가 살아있어야 하는 이유를 당장 20가지 정도 댈 수 있어. 그리고 그것은 죽음이 주변에 민폐를 끼치기 때문에는 아니야. 살면서 네가 누릴 기쁨의 순간들이 당장 머릿속에 그려지기 때문이지. 너는 소박한 것에 만족할 줄 알았고 혼자서 여행을 다니는 것을 즐거워했고 맛있는 것을 먹는 것도, 작은 소품으로 자기 방을 꾸미는 것도, 요리를 하는 것도 좋아했다. 세상에 일본과 제주도 말고 좋은 관광지가 얼마나 많은데 한 군데라도 더 가보지 그랬니. 세상에 맛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데 하나라도 더 먹어보지 그랬니. 아님 그냥 손목 잡고 식당에 데려다가 맛있는 것을 잔뜩 입에 퍼 넣었다면, 너는 어쩌면 안 죽지 않았을까.
유효하지 않은 위로만 가득했을 너의 삶이 나는 너무도 슬프다. 삶에는 고난도 있지만 소소한 기쁨의 존재감도 꽤나 크다고, 그것을 같이 실감해보지 않겠냐고 나는 끝내 말하지 못했다. 너를 질식시킨 것은 그놈의 흙수저가 아니라, 고민을 털어놓아도 매번 소득 없이 돌아오는 공허한 말들이었을 텐데.
..
그리하여 나는 더욱 살려고 해. 나는 어른이 되고 싶다. 주변에 누가 힘들어할 때 절대 눈감이 않는 으른이 될 거시다. 부조리한 세상을 직접 바꾸지는 못할지라도 얼마 안 되는 내 주변 사람만큼은 챙기는 사람이 될 것이다. 나는 아픈 친구에게 공허한 위로를 하지 않으며 먼저 연락을 자주하며 세상의 즐거운 것들을 많이 알려주는 사람이 될 것이다. 나는 지금은 비록 비루한 고졸이지만 나중엔 정말 잘나져서 사람들이 의지를 마음껏 할 수 있는 진정한 어른이 될 것이다.
나는 내일 건강한 밥을 먹을 것이다. 내일 모레 논문 발표도 무사히 잘 마칠 것이다. 취미 생활도 열심히 할 것이고 운동도 꾸준히 할 것이다. 계절 때 재수강하는 교양 수업도 열심히 공부할 것이다. 2월에는 여행도 갈 거고 취업 준비도 할 거다. 나는 너를 잊지 않고도 잘 살 것이다.
죽음은 전염된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S가 유언을 널리 퍼뜨리려 한 것은 슬픔을 전염시키기 위함이 아니었다. S는 힘든 사람들에게 유효한 위로가 돌아가는 세상을 바랐다. 오늘도 내일도 지겹게 살아남을 나는 그의 준엄한 마지막 말을 기억하며 살 것이다.
이런 글은 어떠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