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
- 이창훈
이별에는 끝이 있지만
사랑에는 끝이 없다
꽃은 져도
사랑은 지지 않는다
아니
이 세상 누구도 사랑엔 지지 않는다
이별은 늘 길의 끝에 있지만
사랑은 늘 길이 끝나는 곳에서 시작된다
내 안의 그대
- 이창훈
이 地上에서
이제 더는 너의 주소는 없다
사라진다는 건 쓸쓸한 말이지만
무엇도 사라지는 것은 없다
사라지는 것을 보며
무너지는 生이 있을 뿐,
네가 사라져간 길 위로
무너져 내리는 노을을 보며
내 생도 대책없이 저물어 갔지만
어두컴컴한 내 맘에 차오르는
너는 무너지지 않는다
후회에 대해 적다
-허연
“혼자 아프니까 서럽다”는 낡은 문자를 받고,
남은 술을 벌컥이다가 덜 자란 개들의 주검이 널려 있는
추적추적한 거리를 걸었다 위성도시의 5일장은 비릿했다
떠올려보면 세월은 더디게 갔다 지금은 사라진
하숙촌에서 나비 떼 같은 사랑을 했었고, 누군가의
얼굴이 자동차 앞 유리창에 가득할 때도 그게 끝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아득해지지 않았으니
세월은 너무 더디다
신전에 날이 저문다
- 허연
살면 살수록
과학자들의 말은 맞아떨어진다
영원히 살 수 없으니까 사랑을 하는 거다
따지고 보면
기껏 유전자나 남기고자 하는 일이다
비극은 피하고 싶다고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는 데 있다
어쨌든 기억에서조차 사라지는 게
사랑이다 보니 사람들은 무엇인가 쓰기 시작했다
신전 기둥에 남긴 사랑도 그저 기록일 뿐이다
겁내지 말라고 내가 다 기록해놨다고
죽어도 죽는 게 아니라고
남자는 외치지만
여자는 죽어간다
신전은 세워지고 있지만 여자는 여전히 죽어간다
죽어가는 여자보다
사랑을 잊지 않으려는 남자가
진화상으론 하수다
남자가 세운 신전에 날이 저문다
언젠가는 벽화도 흐려질 것이다
話者 (중에서)
-허연
내가 내 욕망의 화자가 되어야 하는 건
지나친 형벌이다
욕망이 침묵으로 변하는 순간이 있다
밥을 먹고 나서 문득 밥이 객관화될 때,
욕망이 남긴 책임이 나를 불러 세우는 순간이 온다
숙연하게 눈을 내리깔고 있는 저 여자도
두 시간쯤 전에 시리얼로 밥을 먹었을 것이고,
열 시간쯤 전에는 사랑을 했을 것이다
그녀는 지금 조용히 책임을지고 있는 것이다
건기(乾期) 1
-허연
가끔씩 오는 바람과 까마귀와 까마귀가 둥지를 튼
웃자란 나무는 동일한 리듬을 갖고 흔들리고 있었다
햇볕의 방향과 그늘의 크기와 격자무늬 창살의 그림자도
동일한 리듬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한 번도 햇볕을 인정해본 적 없는 불협한 나는
방구석에 잠복해
매일 해가 넘어가는 방향을 주시하고 있었다
여름의 리듬에 동조하지 못했던
나는 이 여름의 복판이 한없이 궁금했다
혼잣말도 리듬을 얻어 돌아오곤 했다
나는 그 시절 내내 리듬에 시달리고 있었다
소립자 2
-허연
기억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 순간은 이미 낡은 것이다
그녀의 작은 손을 감싸고 있던 줄무늬 장갑이라든지,
부스스 깨어나 받는 전화 목소리라든지,
술에 취했을 때 눈에 내려앉는 습기하든지
낡은 것들이 점점 많아질 때
삶은 얼마든지 분석이 가능하다
어떤 오래된 골목길에 내가 들어섰던 시간,
그 순간의 호르몬 변화
가로등 불빛의 밝기와 방향,
그날의 습도와 주머니 사정까지
나를 노려보던 고양이의 불안까지
그 골목에서 이런 것들이 친밀감의 운동을 시작했고
나에게 수정되지 못할 기억으로 남았다
누구는 그걸 사랑이라 했고,
누구는 그날 파열음이 들렸다고 했으며,
누구는 그날 개기일식이 있었다고 했다
바람이 분다, 분석해야겠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허연
보리밭에는 언제나 바람이 불었다
보릿대가 쓰러졌고 수백만 년이 흘렀다
알에서 먼저 나온 형은 보수주의자가 된다
동생은 기회를 내린다 평등을 외치는 것이다
하긴 동생으로 태어난 새가 둥우리에서 할 수 있는 건
혁명밖에 없다 확률은 낮아서 대부분 실패하고
둥우리는 유지된다
형은 눈물을 흘리며 동생을 밖으로 밀어낸다
어수선해진 둥지를 추스르며, 바람이 없었다면,
중력이 없었다면, 알이 하나밖에 없었다면……
형은 이유를 만든다 수백만 년 동안
사라져가는 것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
-허연
생에서 포기는 어떤 좌표도 읽지 않겠다는 결의다
생은 선택된 적 없다
복제된 F1 완두콩들이 생에 들어온다
엉겁결에 생에 들어서고, 생의 한가운데 놓인다
생은 시달리거나 포기하거나 둘 중 하나다,
깨달음이 있는 것 같지만 생판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늘 피를 보면서도 결국 생에서는 X축과 Y축이
와글거린다 이래저래 도망치는 놈은
도망치느라 생으로 숨어들고,
살아보겠다는 놈들도 생으로 걸어 들어간다
무기력하게 좌표 평면으로 걸어 들어간다
한가지 매력이 있다면 생에서는 사라져가는 걸
동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라져가는 것들을 위한 나라는 다행스럽게 없다
지금 이 생이 무덤이다
생은 우리들의 무덤이다 생무덤이다
Cold Case
-허연
한 친구는 부처를 알고 나니까 시 같은 거
안 써도 되겠다며 시를 떠났다
또 한 친구는 잠들어 있는 딸아이를 보니까
더 이상 황폐해지면 안 되겠다는 생각
이 들었다며 시를 떠났다 부러웠다
난 적절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
별자리 이름을 많이 알았거나, 목청이 좋았다면
나는 시를 버렸을 것이다
파킨슨병에 걸린 초파리를 들여다보며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면 시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신중한 내연기관이었다면 수다스럽게
시를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또 시를 쓴다 그게 가끔은 진실이다
난, 언제나 끝까지 가지 못했다
부처에게로 떠난 친구나,
딸아이 때문에 시를 버린 친구만이 끝까지 갔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내 시가 누군가의 입맛을 잃
게 해서 끝까지 가지 못해서
천국은 없다
-허연
사랑은 하필 지긋지긋한 날들 중에 찾아온다
사랑을 믿는 자들
합성섬유가 그 어떤 가죽보다 인간적이라는 걸 모르는 자들
방을 바꾸면 고뇌도 바뀔 줄 알지만 택도 없는 소리다
천국은 없다
사랑이 한때의 재능이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은
인간에게 아주 빨리 온다 신념은 식고 탑은 무너진다
무너지는 건 언제나 상상력을 넘어선다
먼지 휘날리는 종말의 날은 생각보다 아주 짧다
다행히 지칠 시간은 없다
탑의 기억이 사라질 즈음
세상엔 새로운 날이 올 것이다
지긋지긋한 어떤 날이
편지
-허연
적어놓은 건
반드시 벌로 돌아온다
밤새 쓴 편지를
감히 다시 볼 수 있는 자는 많지 않다
세상에 모든 편지에는 죄가 많아
인간은 밤새 적은 편지에 초라해진다
편지를 받은 모두는 십자가에 매달린다
적어놓은 것이니
세상에 남는 법
적은 자들은 늘 외롭고
벌을 받는다
적어놓은 죄, 기록한 죄
편지는 오늘도 십자가에 내걸린다
적은 자의 하루는 슬프고
내걸린 편지는
세상의 어느 호리병 속으로 들어가
영원히 남겨진다
편지를 쓴 죄
그리움 같은 것을 적은 죄
사랑時 1
-허연
걸어서 천년이 걸리는 길을
빗물에 쓸려가는 게 사랑이지
이창훈, 「내 생의 모든 길은 너에게로 뻗어 있다」
허연, 「내가 원하는 천사」
에서 나온 시입니다.
글 작성자- 연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