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James Mcavoy
또래의 친구들은 나이를 먹으면서
대부분 예쁘고 높은 구두를 선호했음에도
난 여전히 굽 낮은 단화나 운동화를 선호했다.
법적으로 성인이 되던 날,
아빠는 나에게 빨간색의 구두를 선물해주셨다.
색 자체는 너무 강렬해
자칫하면 촌스러울 수 있었지만
구두의 디자인과 아우러져
꽤 예쁘다고 생각했다.
아끼고 아끼다
처음 힐을 신은 날,
그 당시 사귀던 내 남자친구는
내 걸음걸이가 웃긴다며 비웃었고
발은 뒤꿈치가 헐고
얼마 안 가 엄지발톱까지 빠져버렸다.
그 뒤로 그 하이힐은
신발장의 맨 위 칸에서 내려올 수 없었다.
나에게 있는 구두라고는
그 빨간 구두 하나뿐이었지만 말이다.
-
몸이 좋지 않아
평소보다 조금 늦게 출근을 하는데
익숙하던 그 길에
낯선 가게가 보였다.
아주 작은 평수에다
간판에는 아무런 글자도 적혀있지 않아
그동안 눈치채지 못했었던 것 같다.
혹시 달콤한 디저트를 파는 가게는 아닐까
가게 안을 들여다보려고 했지만
까만 유리창 때문에 안은 보이지 않았다.
" 어서오세요. "
뒤를 돌아보자
까만 앞치마를 한 남자가 있었다.
안으로 들어오라는 남자에게
난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다.
" 무슨 가게인지 궁금해서 들여다본 거예요.
간판에 이름도 안 쓰여 있길래. "
내 말에 그 남자는 웃으며
구두를 수선해주는 가게라고 설명해주었다.
분위기상으로는 그는 구두보다
커피를 볶는 일이 더 어울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 죄송하게도 운동화는 제가 수선할 줄 모르네요. "
내 신발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에 나는 오른발을 왼발 뒤로 숨겼지만
왼발 역시 같은 신발을 신고 있는 건 당연했다.
그는 나쁜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며
기분 나빴다면 사과하겠다고 말했다.
" 아니에요. 괜찮아요.
구두는 발이 너무 아파서 못 신겠더라구요. "
그는 나에게 어떻게 불편하냐며 물었고
난 홀린 듯 그 구두의 불편한 점을 읊어주었다.
그 꼴은 마치 어디가 아프냐고 묻는 의사와
그를 찾아온 환자 같은 모습이었다.
" 시간이 된다면 내가 손 봐줄 테니
한 번 방문해줘요. "
난 알겠다고 대답했지만
그를 찾아간 것은 4일이 지난 주말이었다.
제시간에 출근하는 시간엔
가게 문을 열지 않았다.
의자를 밟고 올라가 상자를 꺼냈다.
상자는 먼지가 쌓였지만
그 안엔 여전히 예쁜 빨간색의 구두가 있었다.
신발 상자를 옆구리에 낀 채
이름도 없는 가게의 문을 열었다.
가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깊숙이 안으로 들어가자
그가 안경을 낀 채 남성 구두를 손보고 있었다.
곧 나를 발견하고는
안경을 벗고 웃으며 반겨주었다.
가게 안은 밖에서 보는 것보다
꽤 아늑했다.
한쪽 벽에는 많은 구두가
각자의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그 때문에
신발을 판매하는 가게 같은 느낌이었다.
그 구두들이 이미 진료를 마친 것인지
진료를 기다리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일단 내 구두를 받아 내려놓고
커피를 타기 시작했다.
그 구석엔 이 가게에 맞게
작은 에스프레소 머신이 있었다.
곧 가게 안은 커피 냄새로 가득 찼다.
커피를 타는 모습이 예상대로 잘 어울렸지만
아까 집중하며 구두를 만지던 그의 모습을 보고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나에게 커피를 건네 준 그는
내 구두를 살펴보았다.
좋은 구두를 가졌다고 말했다.
" 가끔 신고 싶기도 하지만
그런 게 안 어울리는 것 같아요.
고민만 하다 항상 똑같은 운동화를 결제하죠. "
그는 커피를 한 모금 느리게 들이켰다.
그러고는 쭉 진열된 있는 구두 중
하나들 들고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어앉았다.
그는 내 운동화를 벗기고
그 구두를 신겨주었다.
내 맨발에 닿는 그의 손은
제법 거칠고 투박했다.
난 그것을 발끝으로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손이 닿는 곳을 따라
내 신경이 집중하고 있었다.
조금 벗겨진 페디큐어가 신경 쓰였다.
그가 내 발에 신겨준 것은 파란색의 구두였다.
신기하게도 아주 잘 맞았다.
" 언제 어떤 신발을 신느냐는 중요하지만
누가 어떤 신발을 신느냐는 중요하지 않아요.
당신은 그 운동화도, 이 구두도 모두 어울려요. "
-
그 구두는 여전히 발이 아팠지만
그 전보다는 편하다고 할 수 있었다.
여전히 운동화가 좋았지만
구두는 길들이는 게 중요하다는 그의 말에
의식적으로 자주 구두를 신고 외출을 했다.
여전히 뒤꿈치는 까지기에
밴드를 계속 붙이고 있었다.
주말이 되어 그의 가게를 찾아갔다.
나는 그 구두를 신고 있었다.
그는 반갑다는 듯이 나에게 인사를 하다
내 구두를 보고 웃으며 잘 어울린다고 말했다.
그는 내게 커피를 마시겠냐고 물었고
난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그때처럼 커피를 내리려던 그는
머그잔을 다시 내려놓고는
입고 있던 앞치마를 벗었다.
" 커피는 식사를 하고 나서 어때요?
발이 아플테니 이 근처에서. "
2. Matthew William Goode
아침부터 내리던 비는
오후 6시가 조금 넘은 지금까지 쏟아지고 있었다.
아직 내릴 비가 한참 남았는지
비를 머금은 구름은 아주 시꺼먼 색이었다.
우산에 부딪히는 빗소리를 들으며
발밑의 물웅덩이를 밟지 않게 집중했다.
그러다 빗소리를 뚫고
어떤 음악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노래는 들릴 듯 말듯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다.
가수의 목소리는 여자인지 남자인지
정확히 분간할 수 없는 목소리였다.
나도 모르게 가만히 멈춰 서
노래를 듣고 있었다.
가사를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이런 날씨와 잘 어울리는 노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노래가 바로 앞의
한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게의 간판은 나무로 되어 있었다.
그 앞에 물웅덩이가 있었지만
피하지 않고 철퍽 밟으며 그 문을 열었다.
딸랑딸랑 종소리가 울렸다.
안으로 들어오니 그 노래는 더욱 잘 들렸고
가게 안은 눅눅한 나무 냄새가 났다.
나무로 된 의자, 소파, 책상 등이 가득했다.
아마 이 냄새의 원인은
비 냄새와 저 가구들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곧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이 가게의 주인인 것 같았고
이 가구들은 직접 만든 것 같았다.
소매를 걷어붙이고
잔뜩 더러운 앞치마를 하고 있었다.
" 찾는 게 있나요? "
난 그제야
별 목적 없이 가게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노래가 좋아서 들어왔다고 할 수 없어
그냥 구경하러 왔다며
앞에 놓인 나무 책상을 살폈다.
손으로 만진 나무 책상은
나무임에도 매끄러웠다.
" 높은 책상을 좋아하는 손님을 상상하면서
만든 책상이에요. 그래서 높이가 좀 있죠. "
그의 말대로 그 책상은
내 방에 있는 인터넷으로 산 평범한 책상보다
높이가 훨씬 높았다.
한번 앉아보라며
그는 옆에 있던 의자를 책상 앞에 놓아주었다.
그 권유의 손짓에
조금 망설이다가
어색하게 그 책상 앞에 앉았다.
조금 높은 책상 때문에
허리가 절로 꼿꼿하게 펴졌다.
집에 있는 나의 책상보다
이 책상이 마음에 더 드는 것 같았다.
" 마음에 드는데 가져가기 힘들겠네요.
특히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에는. "
내 말에 그는 괜찮다며
내일 자기가 배달해주겠다고 했다.
결국, 그 책상을 구매하기로 했고
집으로 돌아가 원래 있던 책상을
사용하지 않는 방에 쳐박아 놓았다.
-
오늘은 비가 오지 않았고
그는 약속한 시각에 맞춰
내 집의 문을 두드렸다.
그는 어제 내가 앉았던 그 책상을 들고 있었고
책상과 함께 내 집안으로 들어왔다.
원래 책상이 있던 자리에
그가 만든 책상이 자리했고
그것만으로도 내 방의 분위기는
사뭇 달라졌다.
책상을 바꾸니 다른 가구들도
그에 따라 바꾸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에게 시원한 음료를 한 잔 주기 위해
부엌에서 오렌지 주스를 한 잔 가득 따랐다.
아무것도 없는 냉장고를 보고
아침에 급하게 사 온 주스였다.
주스를 들고 다시 내 방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나는 옆 방에서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내가 어제 힘들게 옮겨놓은
책상을 보고 있었다.
전혀 어울리지 않게
방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인 책상이었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난 어색하게 그에게 주스를 건넸고
그는 어색하게
내가 건네는 오렌지 주스를 받아들었다.
우리는 서로의 눈치를 보다가
이내 둘 다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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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일주일 정도가 지나는 동안
그와 만나는 일은 없었다.
그를 만나려면
그 가게를 찾아가야 하는데
아쉽게도 수제가구를 마구 사들일 만큼의
주머니 사정이 되지 않았다.
아침에는 비가 왔지만 지금은 그쳐있었다.
구름이 걷히고
해가 제법 강하게 내리쬐었다.
손에는 아침에 썼던
장대 우산을 들고 있었고
땅에는 아직 물웅덩이가 있었다.
물웅덩이를 밟지 않게 조심하며 걷고 있는데
노랫 소리가 들려왔다.
그 노랫 소리였다.
멈춰선 그 자리는
나무 간판이 달려있는 그의 가게 앞이었다.
비가 오는 날씨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그 노래는
비가 그친 지금에도
듣기 좋은 노래였다.
난 그날처럼 가만히 서서 노래를 듣다가
가게의 문 앞으로 다가갔다.
역시 그 앞의 물웅덩이를 밟아버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가게의 문을 여니
문에 달린 종이 딸랑딸랑 울렸고
아직 제목도 모르지만
익숙한 그 노래가 더욱 잘 들렸으며
아직 이름도 모르지만
낯익은 그 얼굴도 보였다.
그 얼굴은 조금 놀란 듯하다가
이내 밝게 웃었다.
" 오랜만이네요. 혹시나 하고 틀어 놓았는데
정말 나타날 줄은 몰랐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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