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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eetlyll조회 502l 2
이 글은 6년 전 (2017/12/10) 게시물이에요

http://sinsigel.egloos.com/2979899


우선 염두에 두셔야할 것은 이 글은 조총이 임란 이후 조선군에게 미친 영향이나 실질적인 위력을 과소평가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만 징비록에서 흔히 인용되는 '조총은 사거리가 수백보이나 궁시는 수십 보에 불과하기 때문에 정면 승부는 승산이 없다'라는 문구에 어느 정도의 과장과 단순화가 존재한다는 점을 주로 지적하고자 합니다. 굳이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임란 초기 전황에서 조총은 일본군이 조선군을 패퇴시키는데 효과적이었지만 조총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는 것이 제 사견입니다.



그 논지를 전개하기 위해서 당시 일본군이 운용한 조총의 몇가지 한계를 들어보려고 합니다.


첫번째는 우선 당시 일본군 내 조총을 다루는 병사의 비율이 그다지 높은 편이 아니었다는 점을 들고 싶습니다. 다만, 일본측 기록의 경우 제가 능력이 안되서 아는 사례가 벽제관 전투 당시 다치바나 무네시게 부대 사례(창 640명, 조총 350명, 활 91명) 정도 밖에 없어서 조선측 기록에 산발적으로 남아있는 사료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자 합니다.



1)而丸之用. 比於劍則頗劣故. 持劍者千百. 持丸者數十. 蓋其戰急於前而緩於遠. 是以好陸戰而厭水戰. 陸則急趨膚接. 極手獮殺故常勝


정탁 정만견문록 受命到義州自經略北遊擊餞慰




2) 상이 이르기를, “적병들 중에 총통(銃筒)을 가지고 온 자가 얼마나 되는가?”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수백 명 중에 총통을 가진 자는 1백여 명에 불과합니다.” 하였다.


선조실록권35 26년 2월 20일 을사




3)5월 10일 검찰사의 글에, ‘왜적 가운데 포로가 되었던 사람 정인(鄭仁) 등 3인을 잡았는데 그 모두가 말하기를,


「왜적으로 철환(鐵丸)을 가진 자는 4, 5인 중에 겨우 한 사람이고, 한 사람이 가진 철환의 수효는 15, 16알에 불과하다.


난중잡록 권1 임진년 상




4) 정유년 가을부터 무술년 봄ㆍ여름에 이르도록 천병(天兵)과 더불어 교전하여 사상자가 퍽 많았으므로,


독려하여 점호를 하게 되면 눈물을 흘리며 떠났고, 간간이 집을 버리고 도주하는 자가 있으면 그 어미와 아내를 잡아 가두고서


위협하여 보내기도 했습니다. 포를 쏘는 것도 열 사람 가운데 두세 명에 불과하였고 쏘아서 명중하는 사람은 더욱 적었습니다.


간양록 적중봉소 왜국 팔도 육십육주도


(밑줄은 필자가 쳤습니다.)




이렇듯 조총의 비율이 그렇게 높지 않다는 점은 역으로 여전히 단병기(대표적으로 나가에야리)가 큰 비중을 차지했다는 의미이고(그리고 정탁의 지적대로 실제로 그랬습니다.), 이는 대규모 야전에서 완전히 승리를 거두려면 조총'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한편, 결점은 아니지만 조총이 궁시에 대해 무조건적인 우위를 보일 수 없었던 요소로 사거리를 들고 싶습니다. 다만, 여기서는 최대 사거리보다는 실제 전장에서 화살이나 탄환을 발사하기 시작하는 통상 '교전거리'를 중심으로 논해보고자 합니다.


그 이유는 우선 궁시의 경우 (조선 관군 혹은 의병이 일본군과 맞서싸운)임란 초기 육전이 연이어 일어나던 여름철을 고려하면 각궁의 성능이 상당히 저하되는데, 이 경우 평상시 각궁의 사거리를 도출해 역으로 논하는 것은 큰 오류를 범할 여지가 있어서입니다. 


오히려 (조익이 포저집에서도 논한 바와 같이) 당시 여름철에 많이 쓰인 목궁, 죽궁의 사거리를 연구하는 것이 더 상황을 잘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겠지만, 이 부분은 연구된 바가 거의 없어서 차마 건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조총의 경우도 이론적인 최대 사거리나 최대 유효 살상 사거리를 논하는 것보다 실제 전장에서 사용자들이 명중률이나 시야와 같은 현실적인 조건을 감안해 결정한, 그러니까 당시 실전 사례나 규정에서 나타나는 '교전거리'를 중점으로 논하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아무튼, 보통 이 문제를 논할 때 유성룡 징비록에 등장하는 '궁시는 사거리가 수십 보에 불과하지만 조총은 수백보에 달하니 상대가 되지 않는다' 라는 문구가 항상 언급됩니다. 물론 조총의 사거리가 몇십 미터 수준 정도로 짧은 것도 아니었지만 징비록의 해당 구절 또한 과장의 여지가 의심되어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힘들다는 것이 저의 입장입니다. 그 이유는 당시 기록을 살펴보면 조총을 수백 미터 거리에서부터 사격한 사례가 매우 드물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다음 사료를 보면 일반적인 '교전거리', 혹은 실전에서 사격을 시작하는 거리가 그보다 더 짧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1) 상이 이르기를,


“도산(島山)의 내성(內城)은 그 제도가 어떻게 되어 있는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내성이 아니라 고산(孤山)이 두 층으로 되어 있어 마치 동분(銅盆)을 엎어놓은 모양이고 그리 높지도 않아 조산(造山)과 비슷

한데, 거기에다 목책(木柵)을 치고 그 위에다 성을 쌓아 그것을 내성이라고 하니, 말은 세 겹이라지만 사실은 두 겹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고, 이덕형은 아뢰기를,

“지형(地形)을 따라 두 겹으로 쌓은 것인데 신이 그 삼면(三面)을 둘러보았더니 돌로 쌓고 위 아래에 구멍을 내어 모두 총을 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리하여 그곳 1백 보 내에는 총알이 비오듯 쏟아지고 있습니다. 진인(陳寅)이 당장 들어가 함

락시키려다가 수백 명이 총알에 맞아 죽는 바람에 함락시키지 못했던 것입니다.”

선조실록 권99 31년 4월 29일 계미 기사(밑줄은 필자가 침)



2) 얼마 있다가 왜적의 무리가 흩어져 마을로 들어가서는 문짝이나 혹은 관(棺) 판자도 가져오고, 혹은 누(樓)에 깐 마루 판자도 가지고 와서 성 밖 100보되는 곳에 벌여 세워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판자 안에 숨어 엎드려서 쉬지 않고 철환을 쏘아 댔습니다.


학봉집 권3 狀 진주성(晉州城)을 지켜 승첩(勝捷)한 것을 치계(馳啓)하는 서장




3) 윤근수는 아뢰기를,


“조 총병(祖摠兵)이 우리 나라의 말을 듣지 않고 경솔하게 진군하다가 패했습니다. 지금의 중국 장관(將官) 등은 모두 조 총병을 그르다고 하니, 반드시 경솔하게 대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제 전 유격(錢遊擊)을 보았는데 말하기를 ‘왜적의 탄환은 단지 1백여 보밖에 나가지 못하고 중국의 탄환은 2백 보까지 나가며, 대장군전(大將軍箭)은 6리(里)까지 나갈 수 있다. 원근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이기지 못할 까닭이 없다.’ 하였습니다.”

선조실록 권 33 25년 12월 13일 기해 기사




3)번 기사는 벽제관 전투 패배 이전 중국군 장수들이 보였던 자신감(징비록에서 조총을 걱정하는 유성룡에게 이여송이 그랬던 것과 같이)의 표출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1), 2) 사료, 그리고 일본 조총의 영향을 받아 그를 기반으로 제작하여 전술을 확립했던 조선 후기의 병학교범인 병학지남이나 병학통, 수조규식 등에서 조총의 사격 개시 거리를 100보(약 120미터)로 설정하고 행용총, 곧 보병용 조총의 유효 사거리가 100보 남짓하다는 비변사등록 기사까지 고려하면 아주 그릇된 평가는 아니라고 보입니다.(비변사등록 영조 1년 12월 27일 을사 기사 "兵器之長技, 無過於鳥銃, 而軍中行用之銃, 則其力所及, 不過百步")




이 100보라는 사거리는 세종실록, 세조실록에서 당대 (궁시를 포함한) 무기의 일반적인 교전 사거리가 100보였다고 지적한 것(세종실록 권10727년 3월 30일 계유 기사 : 順蒙曰: “兩軍相戰, 間不過百步。 今此等火砲, 雖不過二百步, 其爲利大矣。; 세조실록 권43 13년 8월 4일 정유 기사 : 조금 있다가 어유소(魚有沼)의 군사가 이르니, 또 여러 위(衛)로 하여금 목채(木寨)를 세우고 진(陣)을 설치하게 하고 편비(褊裨)들을 모조리 거느리고 산 기슭으로 나아가, 적(賊)과 더불어 1백 보(步) 쯤 거리에서 상대(相對)하였다. >)이나 조선 후기 수조규식 중 일부가 적과의 거리가 90보(108미터)일 때 활을 쏜다고 규정한 것, 그리고 경국대전에서 규정한 일반 병졸의 활쏘기 사거리(경국대전 병전 시취조에서는 正兵의 과녁 활쏘기 거리를 120보로 규정하였습니다.)와 비교했을 때 거의 대등한 수준입니다.



오히려 상황에 따라서는 100보 이상의 거리에서 궁시 사격을 개시하는 것도 전혀 불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중종대 왜구를 방어한 사례 중에서는 100보를 훨씬 넘어서 200보~300보 거리까지 (비록 명중률은 떨어졌을지언정) 사격을 한 사례가 있을뿐더러(중종실록 권45 17년 7월 15일 기미 기사 : 倭船四隻果泊海中, 相距約三百步許。 萬戶率軍士, 不量遠近, 射矢殆盡, 倭乃下陸, 相距二百步許。 挺身跳躍, 以板防矢, 盡拾我國之箭), 경국대전에서는 正兵들이 시취용 木箭을 최소 180보(약 216미터)까지 날릴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몇안되는 한국내 국궁 멀리쏘기 실험 결과를 참조하면 각궁의 위력이 저하되는 여름철에 사격을 하였으며 50파운드 이하의 연한 활을 주로 썼음에도 불구하고 200미터는 충분히 넘겼던 사례가 있습니다.


(온깍지궁사회 2002년 제1회 멀리쏘기 대회(2002 울진) 자료



한편, 좀 더 자세히 연구를 해야 하지만 조선 전기 문무관의 활쏘기나 기타 지역 들의 활쏘기 시취 내용에 흔히 포함되었던 (보통 木箭을 사용한) 멀리쏘기 규정거리도 200보에 가까운 점 또한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징비록을 읽어보면 유성룡이 저런 발언을 하게된 배경이 된 사건으로 보이는 기사가 몇 건 등장합니다. 첫번째는 상주 전투에서 화살이 수십 보만 날아갔다는 기사인데, 두번째 기사는 대동강변에서 일본군이 조총을 쐈는데 탄환이 천 여보나 날아와 성의 나무기둥에 박혔다는 기사입니다. 아마 이 두 사건을 근거로 유성룡이 해당 발언을 한 듯 싶은데, 이와 관련한 저의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화살이 수십 보를 날아갔다는 점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점입니다. 다만 여기서 유념해야 할 점은 징비록에서는 상주 전투 발생 직전 제승방략에 따라 각자 집결지에 모인 경상도 군졸들이 연이은 비 때문에 군장이 많이 젖었다고 기록한 점입니다. 습기에 매우 취약한 조선 각궁의 성질을 생각하면 이러한 우천시에 장기간 노출되었을 때 성능이 급격히 떨어질 수 밖에 없고, 막상 실전에서 쓰려고 할 때 사거리가 현저히 줄어드는 현상은 충분히 고려해볼 수 있습니다.



아니면 당시 조선군 중에서 활쏘기에 서툰 군병들이 화살을 수십 보 밖에 못날리는 것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지만(성종실록 9년 7월 16일 을해 기사 : 신이 관찰사가 되었을 때 친히 여러 포(浦)에 나가서 방어(防禦)하는 형편[形勢]을 보니, 선군(船軍)으로서 사관(射官)으로 호칭되는 사람이 각 포에 10여 인씩인데, 활을 잡고 화살을 쏘는 사람은 겨우 두세 사람씩이고 그 나머지는 다 잔열(殘劣)하여 쏘아야 1백 보(步)에도 미치지 못하므로, 완급(緩急)할 때에 무슨 소용이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문제가 되는 것은 병사의 활쏘기 실력이지 활 자체의 성능은 아니므로 약간 핀트를 벗어나게 됩니다. 실제로 선조실록이나 서애집, 정만록 등을 보면 조선 군인들이 다른 장점은 없어도 활쏘는 재주는 대체적으로 뛰어나다고 평하고 있고 대규모의 사수(射手) 관련 기록을 종종 포착할 수 있는 것으로 볼 때 이 점이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보기는 힘들어 보입니다.



두번째 기사의 경우 자신은 없지만, 천 여보를 날아와서 나무 기둥에 박힐 정도의 위력이라면 일반 보병이 들고 다니는 2~3몬메 조총(이 점은 다소 검토가 필요합니다)이라기 보다는 보다 대구경 조총인 대통(大筒 : 요컨데 부산포 해전에서 정운을 전사시킨 것과 같은 종류)), 혹은 사거리가 870여 미터에 달했다는 가카에노오즈쓰 정도는 되야 나오는 위력이 아닌가 싶습니다. 전술했듯이 일반적인 조총의 교전거리가 100보 정도였고, 탄환을 쏴서 1마장에 이르르면 살상력이 거의 없어진다는 명측 장수(정탁의 용사일기에서 인용)의 증언을 참조하면 징비록의 해당 구절에 나온 사거리를 일반화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참조할만한 자료로서, 오스트리아 스튀리아Styria 무기고의 16~18세기 머스킷을 대상으로 한 정밀 실험 결과를 보면 시대, 종류, 화약량, 탄환무게에 상관없이 발사 후 100미터 거리에서는 운동에너지가 발사직후 운동에너지와 비교했을 때 자그마치 40퍼센트로 감소했습니다.


: Peter Krenn, Paul Kalaus and Bert Hall, "Material Culture and Military History : Test-firing early modern small arms",


Material History Review 42, 1995, p.p. 101~109 참조)



그렇다면 실전에서 사격을 함에 있어 '교전거리'의 차이는 거의 비등한데, 조총의 경우 관통력이 우월하고 궁시의 경우 연사력이 우수합니다. 명중률의 경우 활강식 전장총인 조총의 한계를 고려하고(앞서 언급한 오스트리아 머스킷 실험 자료를 보면16~18세기 머스켓을 대상으로 행한 명중률 실험을 보면, 총기를 단단히 고정시켜놓아 미세한 손떨림과 같은 명중률 저하 요소를 최소화하고 사격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100미터 거리에서 사람 크기의 표적을 맞출 확률이 절반 가량이었습니다.), 여기에다가 전술했듯이 일본군 내 조총수의 비율이 그렇게 높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면 단순히 사격전에서 궁시가 일방적으로 열세에 처한다고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서애집에서 궁시 운용에 유리하고 조총 운용에 불리한 골짜기나 울창한 숲과 같은 장소에서 펼처진 매복전의 사례를 제외한다고 해도 난중잡록이나 쇄미록, 특히 기병 위주의 함경도 조선군의 전과를 기록한 농포집의 장계를 보면 지형이 험하지 않고 비교적 엄폐공간이 적은 곳에서의 사격전에서 조선군이 일방적으로 열세에 처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이어지는 사료 참조)




1)翌日平明 李浩然·金景碩及義兵金弘鼎·金壽富等 率軍馳到 先令騎馬七人 分左右馳突 示勇誘引 則賊徒先鋒百餘 揮劒追逐 又數百餘 川邊越來 建旗結陣 諸軍或上山放石 或放炮亂射 進退交戰 中斃者甚多 逢箭者不知其幾 賊不勝退去之際


쇄미록 임진년 8월 29일 기사(관군 및 의병군이 목책으로 둘러싼 일본군 진지의 적을 강변까지 유인해 사격전을 펼친 전투입니다.)




2) 向吉州。巨魁政丞稱號名直正者,監司稱號名都關汝文者及節度使稱號名不知將等五人。率精勇軍四百餘名。敢死突戰。多放鐵丸爲白去乙。左斥候將吾村權管具滉,右斥候將安原權管姜文佑,別將玉連萬戶安沃,臣從事官造山萬戶印元忱,軍官慶源土及第黃嗣元,鍾城府使軍官土及第朴銀柱等。各率所部。一時突陳。廝徒下卒。無不鼓勇。射矢如雨。倭賊等。皆下馬地鬪爲白如乎。猝遇突騎。自申初至日昏。兩軍出沒交兵。力屈。始爲登山北走爲白去乙。


농포집 권1 장계 길주장평파왜적장계(인용문에 앞서 정문부의 기병대가 길목에서 일본군을 급습한 후 길주로 향하면서 일본군을 

지속적으로 공격하다가 일본군 지원부대를 만나 전투를 벌이는 내용입니다.)




3)二十八日早朝。始叱瀰滿臨溟野中。入向吉州爲白去乙。伏兵將訓鍊正具滉,僉正朴銀柱,僉使姜文佑,判官印元忱高敬民,定虜衛金國信。各率所部。尾擊接戰。三衛段。遮前截腰。進退接戰。自辰初至酉時。追至六十餘里。訓鍊判官元忠恕段。吉州城外二十里許。伏兵爲白有如可。亦爲突出接戰。射矢鐵丸。彼我俱發爲白乎等以。未得短兵相接。只以輕騎馳逐。地廣則挾擊。地窄則尾擊。從事官學諭李成吉給傳令。迫至賊陣。使之督戰。與賊相距十數步。終日馳射。流血滿道。中箭死者不知其數爲白良置。


농포집 권1 장계 여왜적대군전백탑교급왜적퇴주장계(임명야에서 일본군을 급습하여 궁기병이 기동력을 발휘하면서 사격을 하다가 길주성 밖 20리 부근에서 지속적인 사격전을 벌이는 전투입니다.)




3)처음에 진주가 여러 진(陣)에 급함을 고하였더니 정인홍(鄭仁弘)이 가장 김준민과 중위장(中衛將) 정방준(鄭邦俊) 등으로 하여금 스스로 정예한 사수(射手) 5백여 명을 선택하게 하여 달려 보내어 구원하다. 본월 9일에 단계에 이르니 해가 이미 뜨다. 큰 마을 하나가 시내의 동편에 있는데 앞에 대숲이 있다. 사람도 피곤하고 말도 피곤하므로 머물러 밥을 짓다. 전라 우의병대장 최경회(崔慶會)가 군사 2천 명을 거느리고 바야흐로 단성에 머물러서 합천 군사와 합세하여 진주로 전진하려 하다. 단성의 피란하는 남녀들이 산에 올라서 바라보고는, “전라도 대군이 본현에 머물러 있고 또 합천 군사가 잇달아 올 것이니 다행히 잠깐이나마 죽음을 면하겠구나.” 하다. 밥 먹은 뒤에 장수와 군사들이 출발하니 짐수레가 앞에 섰다. 몇 리쯤 가자 앞서 가던 자가 뛰어와 외치기를, “많은 적이 여기 이르렀다.” 하였다. 준민이 놀라 일어나 보니 단성 청고개(靑古介)로부터 단계에 이르기 까지 산과 들의 촌락을 일시에 분탕질하여 연기와 불길이 하늘에 자욱하고 포성이 땅을 진동하다. 준민 등이 불의에 이것을 당하자 사세가 심히 창황하여 몸을 날려 말에 뛰어올라 대숲 밖에 나가서 아래위로 달리며 충돌하는 즈음에 군관 윤경남(尹慶南) 등이 또한 달려와서 크게 외치기를, “두 장수가 이미 포위 속에 들었는데 너희들은 와서 구하지 않느냐.” 하다. 이에 5백여 명이 고함을 치며 함께 나가니 적이 우리 군사를 바라보고는 대숲 속으로부터 차차로 나왔는데 큰 군사의 매복이 있을까 겁내어 접전한지 얼마 안 되어 퇴각하여 시냇물을 건너다. 두 진이 상대하고 있는 곳에 화살은 비 오듯 하고 총소리는 뇌성과 같다. 적이 아직도 용감히 싸우고 퇴각하지 않다가 마침 승의장(僧義將) 신열(信悅)이 군사를 거느리고 잇달아 이르매 세력이 더욱 장하여 사기(士氣)가 절로 배나 되어 일시에 어울려 공격하니 적이 드디어 퇴각하여 달아나다. (밑줄은 필자가 침)


난중잡록 권2 임진년 하(지형을 최대한 활용하여 불시에 일본군을 기습하는 일반적인 매복전과 달리 해당 전투에서는 일본군이나 조선군 양측 다 전열을 어느 정도 가다듬으며 접근하다가 사격전으로 이어지는 점, 그리고 비록 조선측 지원군이 있었다지만 지원군 도착 이전에 조선군 전열이 붕괴되거나 열세에 처한 흔적이 없다는 점이 주목됩니다.)



오히려 다음 사료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야전에서 조총 이상으로 조선군에게 큰 부담을 준 건 일본군의 근접전 능력이었다고 저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경은 왜적과 싸워보았는가?”


하니, 시언이 아뢰기를,


“신은 왜적이 입성한 때로부터 시작해서 이후로 대소의 전투를 1백여 차례나 치렀는데 왜적과 서로 싸우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왜적은 각자가 싸우는데 한 번 대장의 분부가 떨어지면 기필코 승첩을 거둘 때까지 있는 힘을 다해 싸우기 때문에 그들과 전투하기가 어렵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 나라 사람이 창졸간에 왜적을 만나게 되었던 까닭에 방어할 겨를이 없었다.’고 합니다만, 제가 생각하기로는 설령 여유있게 이적과 마주쳤다 하더라도 방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마전(馬戰)으로 한다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방포(放砲)에 있어서는 어떠한가?”


하니, 시언이 아뢰기를,


“총통(銃筒)은 두려워할 만하나 제대로 살펴보기만 하면 피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 사람과 비교하면 어떠한가? 어떤 이는 ‘왜적은 마전(馬戰)을 잘 못한다.’고 하는데, 그런가?”


하니, 시언이 아뢰기를,


“마전 역시 극난(極難)한 일은 아닙니다. 왜적이 처음에는 잘 못했지만 나중에는 능숙해졌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왜적은 총을 잘 못 쏜다는데 사람들이 감히 대적하지 못하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하니, 시언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 사람은 적을 보기만 하면 먼저 궤멸되어 달아나는 것으로 능사를 삼습니다. 장수의 경우에는 아무리 충성스럽지 못하다 하더라도 군율을 두려워하여 감히 먼저 달아나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달아나는 군졸을 다 죽일 수 없는 형편인데 바로 전부 죽일 수 없기 때문에 도망을 치는 것입니다. 왜적은 총을 잘 쏘지는 못한다 해도 아군이 활 두 발을 쏘는 사이에 별안간 앞에 나타나니 우리 나라 사람은 잘 쏜다고는 하지만 멀면 맞추지 못하고 가까우면 왜적의 칼을 두려워하는 형편입니다. 그리고 활을 쏘고 나서 단병(短兵)으로 달려들까 두려워하여 미처 쏘지도 못하니 활을 쏘는 것도 믿을 게 못 되는 실정입니다. 왜적이 칼을 잘 쓴다고는 하지만 우리 나라 사람이 칼을 잡고 나아가면 대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나라 사람은 이렇게 하지 못하고 모두들 도망치는 것을 상책으로 알고 있는데, 제대로 도망치지도 못하고 왜적에게 살해되고 맙니다." 

- 선조실록 권188 38년 6월 7일 경술 기사 -


요약하자면 원거리에서의 조총의 위협은 의외로 크지 않고 오히려 근접전의 위협이 더욱 컸다는 내용입니다. 이는 임진왜란 당시 전투에서의 패배가 궁시의 열세가 아니라 근접전에 돌입했을 때 대응수단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지적, 그리고 맨 처음 인용한 정만견문록에서 보이는 견해와 상통하는 바가 있어 더욱 주목됩니다.


(인제집 권8 답장감사서 "本國取人。偏於弓矢。而不用殺藝。故所習。亦偏於弓矢而不用短器。壬辰之敗。非弓矢之不利也。彼以短接而吾無以應之")




결론을 짓자면 비록 조총이 당시 기준으로 선진적인 개인화기였음이 분명하지만, 낮은 조총수 비율이나 궁시에 비해 월등히 우월하다고 보기 힘든 교전거리와 같은 한계 때문에 궁시 위주 조선군을 완전히 제압하기 위해서는 조선군이 미숙한 근접전과의 병행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 글은 그렇게 깊이있게 분석한 글이 아니라 심층적인 검토를 거쳐야할 점이 많습니다. 당시 조선군이 사용한 각종 활의 종류와 그에 따른 사거리 편차(특히 장마철에 많이 쓰였을 목궁, 죽궁의 성능)나 구경과 그에 상응하는 화약량, 탄환 무게에 따른 조총의 실질적인 사거리와 관통력, 그리고 본 글에서는 제대로 다루지 못한 조선군 내에 있었던 개인 화기의 성능이나 비율(비록 궁시가 주무기였다지만 관변 연대기나 개인 일기류, 문집에서 개인화기 운용 사례가 자주 등장하며, 이는 활, 조총과 같은 개인 휴대 원거리 병기를 이용한 전투를 연구함에 있어 큰 비중을 차지할 것으로 보입니다.)등을 더 연구해야 정치한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제 능력밖이라 우선은 본 졸고로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지적은 겸허히 받고자 합니다.


특히 사료의 선택과 해석, 논지 전개에 있어서 부족한 점을 지적해주시면 무척 감사하겠습니다.



추신.


일본군 장수 가문측에 나타난 병종별 비율은 스즈키 마사야 씨의 저서 戦国軍事史への挑戦 ~疑問だらけの戦国合戦像 

p.p. 62~74에서 단편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가문문서에는 창, 활, 철포 이외에 기마무사, 기치, 치중병 등 여러

병종을 같이 기재했지만 무기에 초점을 두고자하는 이 글에서는 창, 활, 철포 비율만 제시하겠습니다.

시기는 임진왜란 초까지 입니다.


1) 上杉 가문 사례 : 총 인원 5514명(1575년)

창 : 65.4퍼센트 / 철포 : 5.7퍼센트 / 활 : 0.1퍼센트

-> 전체 무기 중 철포 비율 : 약 8퍼센트


2) 武田 가문 사례 : 총 214명(1562년)

창 : 46.3퍼센트 / 철포 : 10.3퍼센트 / 활 : 10.3퍼센트

-> 전체 무기 중 철포 비율 : 약 15퍼센트


3) 北条 가문 사례 : 총 938명(1590년)

창 : 35.2퍼센트 / 철포 : 11퍼센트 / 활 : 7.5퍼센트

-> 전체 무기 중 철포 비율 : 약 20.5퍼센트


4) 立花統虎 / 高橋統增 사례: 총 1400명(1592년)

창 : 35.7퍼센트 / 철포 : 14.3퍼센트 / 활 : 7.1퍼센트 

-> 전체 무기 중 철포 비율 : 약 25퍼센트


한편 스즈키 마사야는 동일저서에서 당시 甲州 유파 병학에서는 철포 사격 개시 거리를 30간(약 54미터)로 규정했다고 하며, 

키슈(紀州) 사이가(雜賀) 출신인 佐武伊賀守의 각서에서는 당시 철포를 10간(약18미터) 거리에서 많이 사격했다는 기록을 제시하면서 동시대 유럽에서 효과적인 철포 사거리로 규정한 60야드(약 54미터)와 일치한다고 주장했습니다.(p.p.159~160)


반면 구보타 마사시가 지은 "일본의 군사혁명"에서는 철포 사격 연습 거리를 약 100미터로 지정한 에도시대 규정을 언급한 바 있습니다. 이는 제가 본 글에서 언급한 조선측 사료와 거의 일치하는 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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