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609~1770년까지 일본의 최대 교역국은 조선이었다.
2. 조선은 청나라로 부터 비단을 100원에 수입하여
일본에 300원에 팔아 먹었다.
3. 임진왜란 기간에 이순신 장군은
일본군이 점령하에 있는 부산포에
부하들을 잡입시켜서 그곳 일본 상인으로부터
조총을 사들였다. (밀수)
4. 임진왜란 기간에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일본군은
간도를 침공하여 여진족과 전투를 벌여지만,
패배를 당하고 함경도로 쫓겨났다.
퇴각하는 과정에서 일본군은 수백명의 여진족과 만주산 말 78필을 사로 잡아 갔다.
그리고는 수백명의 여진족과 만주산 말 78필은 일본 열도로 옮겨졌다.
여진족들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있는 도쿄로 옮겨져서 마을을 이루면 살았는데
그 후손들이 아직도 살고있다.
그리고 만주산 말들은 구마모토로 옮겨져 자체적으로 번식하면서
1930년까지 이어 왔지만, 단종되었다.
5. 1880년대 조선의 방곡령 일부는 일본에 엿 먹이려는 조선 관리의 술책이었다.
당시 일본은 흉년이었고, 조선은 풍년이라서 조선산 쌀과 콩을 사가려는
일본상인들이 많았다.
싼 가격에 사서 일본본토에 비싸게 팔아 먹으려는 왜인 상인들의 수작인것 을 아는
조선 상인들은 곡물값을 높이려는 목적으로 조선 관리에 로비를 하여
방곡령을 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일본 상인은 곡식을 수입 못했고, 조선산 콩과 쌀 가격은 급상승했다.
당연히 조선에 있는 일본 공사관측에서 조선정부에 항의를 했지만,
조선정부는 배째 라는 식으로 무대응을 하였다.
조선에서 일본 상인들은 손해를 보자,
일본 해군이 조선에 출동하여 무력시위 하면서 방곡령 해지를 요구하였다.
조선 정부는 한달만에 방곡령을 해지하면서 다시 조선산 곡식이 일본에 수출되었지만,
그 사이에 조선산 곡식은 3배나 가격이 뛰었다.
결국 조선 상인들의 배를 채웠고, 방곡령을 했던 관리는 일본측 항의로 귀양을 갔지만, 바로 풀려나왔다.
조선 정부는 수출 가격 상승으로 세수 를 확보했다. 조선측이 유리했다.
통상조약 위반으로 조선은 일본에 위약금을 물어주기로 했지만,
조선은 배째라는 식으로 시종 일관 버티다가 7년후에
위약금을 일본측에 줬지만, 원금의 1/5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