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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야한소리ll조회 8854l 4
이 글은 12년 전 (2012/9/30) 게시물이에요

 

세종과 그의 가족들 1 | 인스티즈

뿌리깊은나무의 태종



세종의 부모는 다들 아시다시피 왕자의 난을 일으켜 아버지를 내고 스스로 왕이 된 이방원, 즉 태종과 

그런 그를 도왔던 여장부 원경왕후 민씨입니다.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 사이에서는 4남 4녀의 자식이 태어났습니다만 이것은 생존했던 자식의 수고,

실제로는 세종의 큰형인 양녕이 태어나기 전 세명의 아들이 태어났었다고 합니다.

태종이 왕이 되기 전 태어나 어린 나이에 요절했으므로 기록엔 남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만,

어쨌든 세명의 자식을 잃고 태어난 장자가 바로 세종의 형이자 한때는 나라의 세자였던 양녕대군입니다.


양녕대군이 태어났을 무렵, 태종은 세명의 아이를 잃은 후라 그런지 이 아이만은 건강하고 무탈하게 크길 바라는 마음에서

원경왕후의 친정집에 맡겨 양녕을 키웁니다. 둘째 효령대군 역시 다른 집에 맡겨 키웠습니다.

하지만 셋째였던 세종이 태어났을 무렵엔, 정적들의 위협때문에 수세에 몰려 이방원이 몸을 숙이고 있던 시기로,

갓 태어난 아들 세종을 대비(원경왕후)와 번갈아 안아주고 업어주며, 무릎에서 떼놓지 않아

가장 도탑게 사랑한 아들이었다고 합니다.


또 세종이 세자로 책봉되기 전, 대군시절 태종은 세종에게 

"너는 할 일이 없으니 편하게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하라"며 예능을 할 수 있는 모든 여건을 마련해줍니다.

왕이 될 수 없는 왕자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이었겠죠

세종은 실제로 그림이나 악기보다는 책을 더 좋아했지만, 아버지의 권유로 악기 등을 배우기 시작했고

하여 실제로 충녕대군은 훗날 형인 양녕대군을 가르칠 수 있을정도로 예능에 정통해졌다고 합니다.


또 세종이 대군시절 병이 났지만, 계속 책을 읽자 아버지 태종이 세종의 집에 있는 모든 책을 가져가버렸습니다.

이때 어쩌다 <구소수간>이란 책을 빠뜨리고 갔는데 세종이 이 책을 읽고 또 읽었다는 이야기 역시 

세종의 일화 중 유명한 일화 중 하나입니다.




이 외에도 세종이 즉위한 뒤, 상왕인 태종이 세종에게 

"몸이 비중하시니 때때로 밖에서 놀아 몸을 존절히 하셔야 하겠으며.."라고 사냥을 권한 일도 전해집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세종이 "아..비만이셨구나, 날씬하시지는 않으셨구나..그랬구나.."하고 알 수 있었죠 ㅋㅋ


고기 없이는 수라를 드시지 않을 정도였다 하니,

책만 읽고 운동하지 않는데다가 고기반찬을 참 좋아라 하셨던 세종이 몸이 후덕했다는 사실은 놀랍지도 않습니다 ㅋ



세종과 그의 가족들 1 | 인스티즈

대왕세종의 원경왕후



태종이 직접 말하기도 하였고, 기록에도 남아 제법 알 수 있었던 태종과 세종과의 관계와는 다르게

어머니 원경왕후와 세종과의 관계는 거의 기록에 남아있지 않습니다만,

그래도 남아있는 일화를 살펴보면,


어머니 원경왕후는 아들 중에서도 다음 보위를 이을 큰아들 양녕대군과 막내아들 성녕대군에 대한 마음이

유독 애틋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녀가 왕비였으므로 기록에 거의 나타나지 않아 알 수 없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세종과는 어쨌다더라 하는 기록은 거의 없는데요,

비록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반대했던 어머니지만, 세종의 효심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지극했습니다.


세종이 즉위하고 얼마되지 않아 , 어머니 원경왕후는 학질이라는 병을 앓게 됩니다.

이에 세종은 직접 원경왕후를 간병하면서, 관음보살에게 기도케 하고,

직접 어머니를 모시고 피병(당시엔 병에 걸리면 여기저기를 돌아다녀야 병에서 도망칠 수 있다고 믿어,

 이리저리 거처를 옮기는 것)을 가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왕이 직접 피병시킨 경우는 없었는데요, 세종은 신하들의 반대를 피해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한밤중에 절로 어머니를 피병시켰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모실 곳을 직접 깨끗이 쓸고 닦은 후에야 어머니를 모시었다고 합니다.


밤중에 몰래 나가서 인지, 당시 기록엔

왕이 낮에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업무를 보고 밤이면 어머니 간병을 위해 남몰래 절로 나가는 것을 

나흘이 되도록 아무도 몰랐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를 데리고 내시 두명만 대동하다보니 길을 잃고 헤맨 적도 많고 그랬다네요.


이런 정성이 통했는지 원경왕후의 병이 차도를 보여 다시 창덕궁으로 옮긴 그해,

병이 다시 심해져 결국 원경왕후는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게 됩니다.


한번도 아버지 태종의 뜻에 거역해본 적 없었던 세종이지만,

아버지 태종이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 원경왕후의 상복입는 기간만큼은 고집을 피워 결국 기간을 늘리고

어머니 무덤가에 절을 세우려고까지 했답니다.




세종과 그의 가족들 1 | 인스티즈

대왕세종의 소헌왕후


세종하면 세종만큼 유명한(?) 소헌왕후에 대한 이야기를 빠뜨릴 수 없을 것입니다.

실제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역사 속 부부이기도 합니다.(세종과 소헌을 뗄레야 뗄 수가 없음!)


소헌왕후는 비록 드라마틱한 일을 겪긴 했지만,

세종 치세동안 별다른 외부활동 없이 오직 내명부만을 평화롭게 다스리며 남편 세종을 성심성의껏 내조한 까닭에

기록에는 그다지 많이 남아있지 않는 편입니다.


세종과 그의 가족들 1 | 인스티즈


소헌왕후 하면 시아버지 태종에 의해 친정이 몰락한 일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데요,

이것이 아마 그녀 일생의 가장 큰 사건이 아니었을까요.

아, 남편이 왕이 된 것도 굉장히 큰 사건이겠네요.

어쨌든 이런 소헌왕후를 살펴보자면,


소헌왕후는 14살의 나이에 2살 어린 충녕대군과 혼인을 하고 경숙옹주로 봉해졌다가 나중에 삼한국대부인으로 다시 봉해집니다.

사실 이러한 작위 이야기는 불필요한 부분이니 여기선 생략할게요

궁금하시면 소헌왕후 심씨라고 검색해보심 될 듯해요 ㅎㅎ


세종의 나이 16, 그러니까 그녀가 18이 되던 해,

첫 아이 정소공주를 낳은 것을 시작으로, 세종이 왕이 되던 즉위해에 태어난 셋째아들 안평까지

다섯 아이가 이미 세종이 왕이 되기 전에 태어났습니다.

거의 연년생(정소와 문종만 두살, 나머지는 연년생. 정소공주,문종,정의공주,세조,안평대군이 태어났음)


안평이 태어나고 얼마 있지 않아 아버지 심온이 추포되어 사사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한순간에 국모에서 역도의 딸로 몰린 심씨는

안으로는 산후우울증, 밖으로는 집안이 몰락하고 신하들의 폐비주청에

매우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그리고 이 무렵 태종의 뜻에 따라 세종은 처음으로 후궁을 맞이하게 되지요

이래저래 심씨의 처지는 위태롭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 일례로 시어머니 원경왕후가 왕비에 바로 책봉되었던 것과 다르게

심씨는 무려 14년이나 흘러 왕비에 책봉되었던 것만 봐도 그녀의 입지가 얼마나 위태로웠는지 알 수 있게 합니다.


여기서 실록에서 전하는 한가지 일화가 있습니다.


당시 세종의 곁에서 일하던 소비라는 궁녀가 있었는데,세종의 곁에서 일을 시키다가 얼마뒤 다른 일을 맡기자

소비는 자신이 다른 일을 맡게 된 것이 소헌왕후때문이라고 생각하여 소헌왕후의 옷을 찢어 버린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때는 여러정황때문에 제대로 벌을 주지 못하였다가 나중에 태종이 알게 되어 엄벌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처럼 입지가 약하고 위태로웠던 심씨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남편 세종의 사랑때문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실제 세종은 심씨가 오고 갈 때에 직접 일어나 그녀를 반기고 마중할 정도로 존중했으며,

신하들 앞에서 공공연히 그녀를 칭찬한 적도 더러 있었습니다.


앞서 말한 소비의 사건을 신하들에게 말할 때,

공비가 투기하지 아니하니 부왕도 이를 칭찬하셨다고 했으며,


훗날 문종의 부인이었던 순빈봉씨가 동성애사건으로 퇴출당할 당시에도

"우리 조종 이래로 가법이 지극히 바로잡혔고, 내 몸에 미쳐서도 중궁의 내조에 힘입었다.

 중궁은 매우 성품이 유순하고 언행이 훌륭하여 투기하는 마음이 없었으므로

 선왕께서는 매양 나무가지가 늘어져 아래에까지 미치는 덕이 있다고 칭찬하셨다"

며 신하들앞에서 부인자랑을 합니다.


이처럼 두 사람은 매우 금슬이 좋았고, 왕이 된 후에도 소헌왕후와의 사이에서는

계속하여 자식이 태어나 총 8남2녀, 10명의 자식들이 태어났는데요,

(문종,세조,안평,임영,광평,금성,평원,영응,정소공주,정의공주, 여기서 정소공주는 12살에 요절하고, 광평, 평원대군이 말년에 연이어 20살 안팎의 젊은 나이로 요절)

이 기록은 왕비로서 뿐만 아니라 조선왕실 여자중에서도 가장 자식을 많이 낳은 기록이라고 하네요.

(첫째 문종(정소가 어린나이에 요절했으므로)과 막내 영응대군과의 나이차이는 무려 20살에 가깝다고 합니다;ㅋ)


또한 소헌은 실록에 중병이 났다는 기록이 두차례 나옵니다.(심온사건이 있고 몇년뒤, 그리고 승하직전)

이때마다 세종은 그녀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한 온갖 방안을 강구한 기록이 남아있구요,

부부 동반으로 온천여행을 다녀오기도 합니다.


소헌왕후가 승하한 후에는, 그녀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성리학의 나라였던 조선의 궁 안에 내불당을 건립하기도 하구요(이것때문에 신하들과 세종이 엄청 싸웠죠)

불교서적을 편찬하기도 합니다.

또 세종이 직접 월인천강지곡을 지어 그녀의 명복을 빌기도 했습니다.


실록에는 소헌왕후 승하 후, "임금이 마음 둘 곳이 없어보인다"며 그 쓸쓸함을 기록으로 남겨두기도 했습니다.


이 외에도 기록을 살펴보자면,


세종 8년 있었던 연회에서 세종이 중전의 상을 보았더니,

밖의 것보다 고기가 작아 매우 화를 냈다는 기록이 있으시구요,


또 세종 22년, 세자에게 업무를 넘기면서 세종은 일을 처리하는 장소를 사정전에서 침소였던 강녕전으로 옮기게 됩니다.

당시엔 왕과 왕비가 한 처소에 머물렀으므로, 강녕전에는 소헌왕후 역시 머물렀는데요

이렇다보니, 세종을 찾는 신하들과 소헌왕후를 모시는 식구들이 뒤섞여 강녕전이 어수선해지므로,

세종이 중전이 머물 곳을 "교태전"이라 정하고 강녕전 바로 뒤에 짓게 합니다.

이는 중전의 공간을 존중하고 생활하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한 세종의 배려에서였는데요.

보통 건물을 짓고 이름을 정하는데 반해 미리 이름을 지어놓았다는 것은

미리 중전을 위한 자리로 생각하고 지었다고 보여집니다.


또 소헌왕후 사후 정인지가 지은 제문 초안을 읽고

"지문(誌文)은 후세에 함께 보는 것인데, 지금 왕비가 간청하고 알현하는 사사(私事)가 없고, 아랫사람에게 미치는 은혜가 있어, 의심하고 꺼리는 것이 없었으니, 이 뜻으로 인지(麟趾)에게 일러 아울러 싣게 하라"

라고 꼼꼼히 챙기셨다고 합니다. ㅎ




세종과 그의 가족들 1 | 인스티즈


아! 세종과 소헌왕후의 무덤이 합장릉인 것 알고 계신가요?

이는 자식들이 아닌 세종이 소헌왕후 승하후 직접 합장릉으로 만들 것을 명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세종과 소헌왕후의 합장릉인 "영릉"은 조선 최초의 합장릉이라고 하네요.



세종과 그의 가족들 1 | 인스티즈



사실 이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세종은 그리 좋은 남편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ㅋㅋㅋ

작명센스나 일처리하는거나...

(소헌은 왕비책봉전에 공비라고 불렸는데, 세종은 원래 검비라고 하려고 했음. 

근데 태종이 뜻은 좋으나 어감이 이상하니 공비로 하라고 해서 공비로 결정)




소헌왕후가 너무 길어져서..(단순개인편애ㅋㅋ)

마지막으로 세종의 후궁,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신빈 김씨와 혜빈 양씨에 대해서

이건 증말증말 짧게 이야기하고 다음편으로 쑝! 날아가겠습니다! ㅎ




세종과 그의 가족들 1 | 인스티즈

대왕세종 신빈김씨




먼저 신빈김씨부터 가겠습니다.

신빈김씨는 조선시대 최고의 신데렐라로 불리는 분 중 한명입니다만

사실 이 분에 대한 기록은 세종대에는 거의 전무...합니다.

(세종대엔 워낙 내명부가 조용해서 기록에 남아있는 일이 거의 없어요 ㅠㅠㅠ)

유일하게 세종이 그녀에 대해 공식적으로 말한 기록만이 남아있어 살펴보자면,


신빈김씨는 원래 내자시 여종으로, 세종이 즉위하던 해 

원경왕후가 뽑아 소헌왕후에게 보낸 13살의 어린 궁녀였습니다.

그녀가 언제 세종의 눈에 들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중궁전에 출입하면서 자연스레 눈에 띄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녀는 천성이 부드럽고 아름다우며 양궁(세종과 소헌왕후)를 모시는데 항상 근신할 뿐더러

그녀의 여섯 아들들이 모두 오래 산다 하니, 이것은 매우 귀한 명운이다-

하여, 세종은 이런 이유로 그녀를 소의에서 귀인으로 올려줍니다.


(확실하진 않은데 그녀가 빈으로 책봉된 건 세종 말년이나 세종이 죽은 후로 알고 있어요)


또 소헌왕후와도 매우 사이가 좋아, 소헌왕후는 갓 태어난 막내아들 영응대군의 양육을

신빈 김씨에게 맡기기도 했지요.


그녀는 세종이 승하한 후, 머리를 깍고 절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었으며,

그녀의 아들들은 계유정난 당시 세조편을 들어 세종의 말처럼 아주 오래살았다고 하네요.




혜빈양씨로 말하면 사실 세종대에는 거의 기록이 없습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소헌왕후 생전의 내명부는 정말 조용해서 기록에 나타나질 않음..ㅠㅠ)

신빈김씨처럼 세종이 공식적으로 말한 적이 없어서 그런지,

그녀가 어떤 사람이다 하는 건 세종 사후, 문종-단종대에서야 나타나게 됩니다.


혜빈양씨는 신빈김씨처럼 승은을 입은 경우가 아니라 간택후궁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혜빈 양씨는 소헌 생전엔 기록에 드러나는 일이 거의 없다가

소헌왕후가 승하하고, 내명부를 다스릴 사람이 없게 되자

그때부터 내명부를 다스리며 단종대에 이르러서는 정치활동에 참여하는 등 많은 기록을 남깁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혜빈 양씨는 단종의 양모인데요,

단종이 태어날 무렵, 혜빈 양시 역시 출산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은 단종의 양육을 맡게 됩니다.

(아들과 손자의 나이가 같다니..무엇보다 세종에게는 손자보다 어린 자식들이 더 있었다는 것..ㅇ0ㅇ)


자기 자식들조차 뒤로하고 정성껏 기른 탓에

단종은 혜빈양씨를 지극정성으로 따랐고,

이때문에 단종이 즉위했을 때 혜빈 역시 큰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것이었지요


하지만, 세조에 의해 계유정난이 일어나게 되고,

그녀는 그녀의 아들들과 같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훗날 숙종대에 이르러서야 복권되었고 정조때에 민정이라는 시호를 받게 됩니다.


참 아이러니한 것은 세조에게 안평대군이 반역을 꾀한다고 고한 게 바로 이 혜빈양씨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그 처지가 될 줄은..ㅠㅠㅠㅠ










에고, 이렇게 길어질 줄이야...

읽어주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_-)(_ _)

소헌왕후에 대해 하고싶은 이야기가 워낙 많아서

추리고 추린건데도 저 모양인데요..아..편애..어쩔...ㅋㅋㅋㅋ

사실 제가 세종대왕의 가장 꿰고 있는 부분도 바로 이 소헌왕후 부분입니다.ㅋㅋㅋㅋ

그래서 다른 사람들보다 디테일함 ㅋㅋㅋ


이거 뿌나 시작하기 한시간 전에 쓰기 시작한건데

지금 뿌나 다 끝나감...ㅋ


다음편은 세종의 자식들 이야기고,

아마 그 다음이 신하들과의 이야기가 될 듯.....

아..길다.....

오늘건 제가 생각해도 부담스러울 정도로 기네요 ㅋㅋㅋㅋ


무튼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ㅠ!ㅋ




(+) 너무 길어 생략한 세종의 다른 후궁들에 대해서 짧게 말씀드릴게요

그나마 사랑을 받았던 소헌왕후와 신빈김씨, 혜빈양씨조차 거의 기록이 없다는 것은

그렇지 않은 후궁들은 더 얄짤없는 비중이라는 ....


태종에 의해 간택된 후궁들은 간택되어 책봉되었다는 기록만 남아있을 뿐,

그 외엔 아무런 기록이 없어요

억지로 들인 후궁이라 싫었나 봄..

(태종이 세종 후궁 뽑으려고 가례색 설치했는데 세종이 다시 폐지했다가

태종이 다시 설치하니까 그제서야 후궁을 뽑았음. 이게 소헌왕후 친정 몰락하고 얼마 안되서의 일)


그 외 세종의 자식들을 낳은 네명의 후궁은 낳았다, 죽었다 밖에 없음...

첩지를 받지 못한 후궁도 있음.(상침 송씨, 사기 차씨)


그리고 후궁중에서 세종의 아이를 가장 빨리 낳은 건 영빈 강씨로 왕자 하나를 낳았지요

그전까지는 소헌왕후만 아이를 계속 낳고 있었음.


그리고 세종의 후궁들의 수는 항상 책마다 다른데,

첩지를 받은 후궁이 여섯이고, 받지 못한 두명의 후궁(후궁이라기 보다는 승은을 입은 궁녀, 그래서 기록에 없는)

그리고 소헌왕후까지 총 9명의 부인이 있었던 듯 합니다.






추천  4


 
아 이런거 진짜 좋아 ㅠㅜㅠ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수업보다 더 이해가 잘된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12년 전
중기내꺼♡  대리만족
감사해요 이런거 진짜 좋아요 ㅠㅠㅋ
12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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