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세종대왕의 아빠엄마
태종 이방원×원경왕후 민씨
원경왕후는 고려 명문가 여흥 민씨 가문의 딸
18살에 아버지의 제자였던 두살 연하 이방원과 혼인함
원경왕후도 여장부같은 성격이었음
정도전이 왕자들의 사병을 혁파하려하자 미리 집안에 무기를 숨겨두거나
1차 왕자의 난 때,
낌새가 이상한걸 눈치채 자신이 배가 아프다는 핑계로 (실제로 임신중었음)
궁에 무방비로 들어간 이방원을 불러내는 등
친정 집안과 함께 남편을 서포트함
그렇게 국모의 자리에 오르지만...
원경왕후의 불행은 이제부터 시작이었음ㅠㅠ
태종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후궁들을 엄청 들이기 시작함
민씨 집안 견제 목적도 있었고 태종이 여자를 너무 좋아했음
문제는 원경왕후의 투기가 심했다는 것인데
둘은 후궁문제로 엄~청나게 싸움
그렇게 다투다 한번은 원경왕후 아래 궁인들을 전부 짜르고
원경왕후를 중궁전에 거의 유폐시킨 일도 있었음
그리고 신하들과 함께 후궁 제도 법제화에 대해 논의하고
후궁 입궐 행사도 크게 치르려고 하니까 원경왕후가 식음전폐하고 맨날 울었다고함ㅠㅠ
보다못한 형 정종이 한마디함
"부인하고 자식없는 나도 정으로 사는데 너는 어찌 그러냐."
그뒤로 후궁 입궐 행사는 조용히 치렀다고함
그래도 사이가 엄청 나빴던 시기에도 할 건 다했는지
원경왕후는 40세가 넘어서도 정선공주와 성녕대군을 낳음
그리고... 킬방원은 처남들도 숙청하기 시작함ㄷㄷ
태종은 평소에도 경계한 두 처남들에게 가차없이 사약을 내림
원경왕후도 남동생들 일로 태종 심기 건드리는 말을 많이 했었음
부부사이가 극악으로 치다른 태종은 원경왕후를 폐비 시키려했는데 당연 신하들이 강하게 반대했고 해프닝으로 끝남
근데 그 뒤에도 원경왕후의 출산 기록이 있음ㄷㄷ
"중궁(中宮)이 해산을 하였다. 임금이 김여지에게 하교하셨다. 중궁(中宮)이 늘 난산(難産)을 해 내가 걱정이 많았다. 이제 경 등이 성심으로 약을 지어서 근심이 사라졌다. 마음이 매우 흡족하다."
당시 원경왕후는 48세였다고 한다....
원경왕후는 세종을 포함해서 4명의 아들, 4명의 딸을 가짐
일찍 죽은 아이들까지 합하면 총 12명
조선 왕비들중 가장 다산한 왕비임ㅇㅇ
하지만 태종의 처가 숙청 끝나지 않았음
원경왕후의 남은 남동생들(민무휼, 민무희)까지 죽임
원경왕후의 집안은 그렇게 완전히 풍비박산남
원경왕후의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데 정말 예뻐했던 늦둥이 성녕대군이 14살에 요절함
부부 둘다 장가 보내놓고도 계속 옆에 둘 정도로 사랑했던 막내라 정말 슬퍼했음
막내 아들까지 잃은 왕후는 이때부터 밥도 제대로 안먹는 날이 많아짐ㅠ
그리고 개망나니가 된 맏이 양녕대군이 폐세자가 됨
양녕대군은 태종 부부가 아들 셋을 줄줄이 잃은 뒤에 생긴 아이였음
양녕이 일찍 죽은 아이들 처럼 될까봐 처가에서 길렀다함
(그래서 양녕은 외가랑 친했고 이는 민씨가문 숙청 원인중 하나가 됨)
태종도 폐세자 명내리고 통곡했다 하고 원경왕후는 굳이 말 안해도...
그래도 원경왕후는 죽기 직전까지 가족들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음
학질에 걸리면 한곳에 머무르면 안된다는 속설때문에
세종은 어머니가 아프자 정사를 뒤로 하고 어머니를 모시고 여기저기 돌아다님
기록된 장소만 15군데가 넘음
갑자기 왕이 대비 모시고 몰래 밤에 나가거나 어디로 간지 몰라서 비상걸리는 일도 있었음
태종도 계속 원경왕후가 있는 곳을 찾아가고 병환을 살핌
원경왕후는 세종 2년, 56세의 나이로 죽는데
세종이 머리 풀고 발벗고 통곡했다함 (실록피셜)
이미 어머니 죽기 며칠 전부터 제대로 밥도 못먹은 상태라
태종이 제발 미음이라도 먹으라고 울면서 권했다고
세종은 우리 엄마 능 쓸쓸해 보인다며 사찰을 세우려했지만
불교를 엄청나게 싫어했던 태종이
"내가 들어갈 자린데 사찰을 짓겠다고?"
하는 바람에 사찰을 짓진 못했다고 한다
그래도 태종은 원경왕후 옆에 묻힐 생각은 끝까지 했나봄
태종은 2년 뒤에 원경왕후랑 같은 나이에 눈을 감으며 원경왕후 옆에 나란히 묻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