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0년 후반, 일본의 만주내 무장 독립투쟁 거점 포위 계획 -
1920년 당시,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를 전후하여 일본의 만주내 군사활동이 심화되었습니다.
그에 따라 자연히 한국 독립군들은 새로 근거지를 옮길 수밖에 없었죠.
* 참고 *
[ 기림(磯林) 지대 ]
지대장 : 38여단장 소장 나오키 이소바야(直明磯林, 직명기림)
[ 목촌(木村) 지대 ]
지대장 : 76연대장 대좌 마스조 기무라(益三木村, 익삼목촌)
[ 동(東) 지대 ]
지대장 : 37여단장 소장 마사히코 아즈마(正彦東, 정언동)
그래서 한국 독립군들은 비교적 일본군의 위협이 덜한 연해주 내륙에 정착합니다. 그러나...
- 적백내전 당시 러시아 서부지역 -
당시 러시아에선 전역적으로 내전(적백내전)이 한창이었고, 독립군들이 정착한 연해주 역시
그 치열한 내전의 무대가 되었습니다. 독립군들도 역시나 거기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고요.
무엇보다도 적백내전에서 백군(러시아 구체제 옹호세력)이 일본 제국군의 지원을 받고 있었던 만큼
독립군들은 당연히 적군(소련 공산당, 사회주의 계열)의 편을 드는 것 역시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물론 그 안에서도 정치적인 내분으로 '자유시 참변' 이 일어나게 되었고
소위 민족주의 계열의 일부 무장투쟁 세력들은 다시 만주로 돌아오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
그렇습니다. 만주로 돌아온 당시 무장독립군들에게는 현실적으로 꿈과 희망도 없었던 것입니다...
당시 만주로 넘어간 독립군들에게 남은 건 세 가지 밖에 없습니다. 반민족 행위를 제외하고서는...
첫째, 일본군과 봉천군벌의 추격을 피해 만주 내를 전전하다가 결국엔 잡혀 죽거나 보급난으로 굶어 죽는다.
둘째, 최소한의 생존을 위해서는 때로는 비적이 되어 민간인을 약탈한다. 설령 그게 우리의 동포일 지라도...
셋째, 현실을 인정하고 연해주로 넘어가 그나마 일본과의 반대급부에 서 있는 소련 공산당의 지원을 받는다.
결국, 현실적인 면에서 독립운동을 안정적으로,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길이란 무엇이었을까요?
- P.S -
1920년대 초반입니다. 정말로 그분들이 사회주의 사상에 대해 잘 알아서 그 노선을 자발적으로 택한 것일까요?
그분들 입장에서는 일본만 몰아낼 수 있다면 일본과의 반대급부에 선 누구에라도 도움을 청하는 게 당연합니다.
지금의 관점에서 '독립운동가인데 사상이 어떻다.' 따지는 것은 당시의 현실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 요약 -
당연히 일본 정규군에 비하면 극소수인 한국 독립군은 근거지를 수차례 옮길 수밖에 없음, 그러다 연해주 내륙에 이름
그 과정에서 적백내전에 휘말림, 당시의 독립군들은 당연히 적군 편을 들 수밖에 없었음(백군을 일본군이 지원하기에)
그리고 자유시 참변 이후 다시 만주로 넘어간 일부 독립군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건... 일본군과 봉천군벌의 합동 추적...
그렇다면 당시에 안정적으로 독립운동을 할 수 있는 현실적인 길은 무엇인가?
Q. 국민당의 지원도 있잖아요?
A. 집단적으로 일본군과 봉천군벌의 합동 추적을 피해 만주에서 중국 관내까지의 이동은 쉬울 것 같나요?
그리고 당시 국민당도 군벌들의 토벌 중이었던 만큼 현실적으로 임시정부의 무장을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중국의 민간사회에서도 대부분의 한국인을 일본군의 밀정 또는 앞잡이로 보는 시선이 더 강했습니다.
물론 윤봉길 의사의 1932년, 훙커우 의거 이후로 중국 국민당도 적극적인 지원을 해줍니다.
다만 그건 당시로부터 수년이 흐른 시점이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