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환경이 되든 안되든 무조건 봉제 공장을 차린다
1층은 가게 2,3층은 공장이었던 청계천 평화시장 당시 국내 옷 70퍼를 생산함 그래서 2층 3층에 무조건 공장만 차리면 대박남
2. 어리고 힘없는 여공들을 고용한다
“평화시장의 공장들이 닭장처럼 되어 있고 어두컴컴한 곳에서 어린 여공들이 쉴 새 없이 하루하루 자신의 목숨을 갉아먹고 있다. 하루 16~18시간씩 일을 하면서도 하루 일당은 불과 커피 한 잔 값 정도(…).” 그는 직접 경험해보지 않은 1960~70년대 평화시장의 열악한 노동조건과 나이 어린 시다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묘사했는데, 이는 열세살 때부터 평화시장에서 일해왔던 여성 노동자 신순애씨와의 만남 덕분에 가능했다.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637613.html#csidx6a494b5cf9edd3785e9ec7095e789f4
11~12세에서 많아봤자 16~18세로 어린 여자애들로 고용해야지
대부분 배우지도 못하고 가난해서 급여로 입에 풀칠하고 가족들 먹여살리는 애들임 개꿀개꿀
3. 안전, 보호시설이라곤 전혀 없는 곳에서 마구 잡이로 노동 시킨다
1만명이 근무하고 섬유먼지는 가득하지만 환풍기는 없어도 됨
2평에 13명 몰아넣어도 근무 완전가능 완전가능 완전가능
1층을 다락방으로 복층으로 바꾸면 더 많이 생산하고 많이 일시킬 수 있음
공간 남는거 냅둬서 뭐해? 기계랑 여공들 넣어서 일 시켜야 돈을 벌지
4. 급여? 커피값만 주면 됨~
재단사와 숙련된 미싱사만이 ‘가족의 최저 생계’를 보장할 수 있는 임금을 받았고, 대부분의 미싱사, 재단보조, 시다의 임금은 이에 훨씬 못 미쳤다. 시다 임금은 ‘1인당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칠 만큼 인색했다. 은 1970년 평화상가 의류 노동자의 직무별 임금수준을 나타낸 것이다. 4인 기준으로 1973년 도시지역 최저생계비는 20,617원이다. 최저생계비를 100으로 보았을 때, 재단사 임금은 146%에서 742%이며, 재단보조는 15%에서 73%, 미싱사는 34%에서 121%, 시다는 9%에서 15%이다. 최저생계비는 식비를 중심으로 계산된 것으로, 말 그대로 생존임금 수준이다. 재단사만이 겨우 4인 가족의 생계비를 벌 수 있었다.
http://www.mediapen.com/news/view/104513
아니 급여 그 아까운걸 어떻게 다 줘? 잡일하고 숙련 안된 시다애들은 걍 돈을 받는거에 감사해야지 ㅎㅎ
내가 기숙사도 마련해주는데! 공짜냐고?? 에이 세상에 공짜가 어딨어
여공에게 2층 다락방을 공장 기숙사로 제공해, 급여에서 주거비가 제외됐다.
5. 하루 14시간씩 일 시키고 월 2회만 쉬게 해주면 됨, 아 참고로 명절 대목엔 휴일 없애도 됨
아니 쉴꺼 다 쉬고 놀꺼 다 놀고 난 돈을 언제 벌어?
당연히 14시간씩 일 시켜야지 아 그래도 한달에 두번은 쉬게 해주잖아?
물론 대목이랑 연말 연시엔 안되지 ㅋㅋ 어딜 쉬려고 해 돈벌어야되는데
6 끊임없는 착취로 여공들 건강 나빠지면? 걍 자르면 됨
"휴식 시간을 주지 않아 작업 중 눈치 보며 화장실을 가야 했어요. 다닥다닥 붙은 다이(작업대) 밑으로 기어 나와야 해서 늘 참았다 갔죠. 켜켜이 쌓인 원단이 뿜어내는 먼지는 고스란히 노동자들의 코로, 입으로 들어가 각혈과 폐병을 유발했어요. 회사에 알렸다가는 해고될 게 뻔해 병을 숨기고 일해야 했죠. 우리는 이름도 없이 '1번 시다', '2번 미싱사'로 불렸어요."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586215
쉽게 잊힌 '1970년대 N번 시다'들의 이야기
전태일에서 김경숙까지, 여성노동자운동 발자취 '언니Ro' 탐방기
www.ohmynews.com
에이 지들이 건강관리 못해서 병 걸린걸 누굴 탓해 손해보니까 자르면 됨 어차피 어리고 가난한 여자애들은 많아~
그러다 몸망가지고 죽으면 어쩌냐고? 아니 그걸 왜 내가 책임져 난 일자리만 주면 되지
7. 나라에서 잡으러 오면 어쩌냐고..? ㄴㄴ 전혀 문제 없음 오히려 나 돈 잘벌라고 알아서 나라에서 노동자 패줌~
전태일이 분신자살까지 해서 알렸던 당시 공장 노동 특히 여공들 노동환경의 실체임
이미 8시간 노동, 일요일 휴무가 근로기준법에 있었음에도 아무도 지키지 않았어
저 당시에 저렇게 여공들 갈아서 손쉽게 돈번 부자들이 그 번돈으로 부동산 투자해서 알부자됐다는 말 많지
특히 당시엔 봉제공장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했고 또 맞춤복에서 기성복으로 넘어가던 시기라 정말 많은 산업이 컸어
봉제공장 많았던 서울 청계천, 대구 이쪽은 그렇게 돈번 사람들 굉장히 많을걸?
저 당시 여공들은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노동운동하고 열심히 일했는데
정작 돈은 저렇게 착취한 공장주들이 다 벌고 노동자들은 이란 오명하에 끊임없이 시달려야 했음
어쩌면 아직도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