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규 (? ~ 1011년)
도순검사
당시 상황
고려의 문관이였던 강조가 정변을 일으켜 목종이 폐위되고 현종이 즉위함
현종이 즉위한지 얼마 안되서 요나라(거란)의 성종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 침공
이 때, 도순검사로 부임하며 흥화진을 사수 (전임 도순검사가 강조)
이후 양규의 일대기
1. 요나라 성종이 1010년 11월 17일 1주일간 흥화진을 공격했으나 실패
2. 요나라 성종은 양규에서 총 3번의 투항을 권유했으나 양규는 모두 거절
3. 이후 요나라 성종은 20만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기 시작 (나머지 20만은 무로대라는 곳에 주둔)
4. 양규는 700의 결사대와 수습한 군사 1천을 이끌고 곽주로 가서 6천 요나라군을 몰살시키고 곽주 탈환
5. 곽주에서 요나라군에 잡혀있던 백성 7천 구출
6. 양규는 요나라 예비군이 있던 무로대를 습격해 2천을 죽이고 고려 백성 3천을 구출
7. 서서히 철수하고 있던 요나라군을 참살하며 고려 백성 1천을 구출
8. 철수하고 있던 요나라군과 3번의 전투를 더 벌여 1천을 죽이고 고려 백성 1천을 구출
9. 애전에서 거란군 한 부대와 싸워 1천을 사살
10. 그러나 요나라 성종의 본대가 등장하며 싸웠으나 전사
11. 요나라 성종의 본대도 피해가 막심해 얼마 뒤 압록강을 건너다 흥화진의 수비대장 정성에게 뒤를 공격당해
많은 병력이 전사
요약
원군없이 여요전쟁에서 7번을 싸워 수만의 요나라군을 사살하고 3만여명의 백성 구출
양규가 죽은 후인 1024년 고려 현종은 양규에게 '삼한후벽상공신'이라는 공신호를 추증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