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온이 가물자 말문이 트이게 되었다.
고요를 흥청망청 쏟으며 마음을 읽으려고 했던 날도 있었다.
가끔은 우울하냐는 질문이 새삼스럽고,
슬픔은 남몰래 귀신 같이 내 몸을 빌려 청승을 떨었다.
종이 위로 첨언하는 나는 지나치게 인간다워서 인간이 되려고 한다.
자기 몸을 돌보게 되었고, 좀먹어가는 곳은 애써 손대지 않는다.
살면서 닳게 된 부분과 손쓸 수 없이 딱딱해진 부분이 닿을 때, 쓴다.
쓰는 손은 차갑고 차가운 손을 응시하는 것은 아마 따뜻함의 곤욕스러움을 잘 아는 것일 것.
나는 다정함을 벌칙으로 살고 있다.
나는 나의 슬픔을 비틀더라도 양보다 크게 울 수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자주 웃음이 나고,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이다.
/그대로 두면 그대로 되지 않는, 서윤후
불쌍한 당신, 버림받은 것도 모르고 밥을 우물대고 있겠죠
나도 혼자 밥을 먹다 외로워지면 생각해요
나 몰래 나를 꺼내 보고는 하는 사람도 있을까
내가 나도 모르게 그렇게 행복할 이도 혹 있을까 말예요
/엽서, 엽서, 김경미
불타는 혀를 내밀어 우리는 사랑을 약조했다
사랑의 둘레는 늘 축축하다
/동편 뜰에 꽃을 풀어, 서안나
너의 숨을 사랑해. 바람의 한올 한올이 내 목숨보다 촘촘해.
물병에는 없던 파도가 일고
귓바퀴에서는 너의 선율이 보폭을 빠르게 해.
내 마음의 피복이 벗겨지지. 그대로 들키는 나.
달이 지는 속도로 아름다워지는 너.
/달이 지는 속도, 서덕준
이 순간이 전부인 게 어때서?
딱 한 철 사랑하다 다음 철에 식을지라도
지금 전부인 마음으로 당신을 부르고
당신이 굴피나무 우듬지에서 응답해 온다면!
지나고 나면 사람들은 의심한다
그것이 사랑이었을까, 하고
마치 그림자가 썩은 냄새를 맡으려는 것처럼
킁킁거리며 집요하게
무결점의 진짜 사랑은 어디 먼 무균실에 특별보존 되어 있기라도 하다는 듯
이 순간이 전부인 게 어때서?
사랑이 변하는 게 어때서?
지금 이렇게 전부 주고 싶은데
내 전부를 주어 당신을 활짝 꽃피우고 싶은데
사랑이 아니라면 뭐겠어?
om 4:00 굴피나무 우듬지에서 새는
간곡,
간곡간곡,
간곡간곡간곡,
/om 4:00, 사랑이 변하는 게 어때서?, 김선우
색약인 너는 여름의 초록을 불탄 자리로 바라본다
만약 불타는 숲 앞이었다면 여름이 흔들리고 있다고 말했겠지
소년병은 투구를 안고 있었고 그건 두개골만큼이나 소중하고
저편이 이편처럼 푸르게 보일까 봐 눈을 감는다
나는 벌레 먹은 잎의 가장 황홀한 부분이다
/배교, 조연호
울고 있는 동안은
눈물에 대해 말하지 못한다
이미 나를 지나간 내 거짓말
나는 가볍고
구름은 금세 몸을 바꿔 흩어져
한 번도 우리는 우리를 관통한 적 없었다
나는 지금 울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막 안개를 지나온 것이거나
안개와 섞여본 적이 없음을 알았을 뿐
지나가던 눈물을 훔쳐 살 뿐
그리하여 매번 너무 늦게 울었거나
안개에 얼굴을 묻는
발 없는 나무가 되고 싶었다
/안개 속의 거짓말, 김선재
내가 누군가를 물어뜯지 않는 건
밤이 뭔가를 기록하고 불을 지르고 가 버렸기 때문,
하늘에서 천둥번개가 치면
삵의 울음소리가 복원된 거라고 생각해도 좋아
밤이면 다정한 사람들이 모이지
만질 수 없는데, 먼 울음 들리곤 하지
보이지 않는데, 먼 발소리 들리곤 하지
우리는 타인을 할퀴던 두 손으로
자신의 이마에 길고 흰 사랑을 기록한다
잃어버린 짠맛을 보충하기 위하여
마지막 남은 한 놈을 대하듯 서로의 눈물을 핥아먹는다
/삵, 박서영
우리는 서로를 파괴할 때 더 사랑해요. 우리의 사랑은 얼마나 얇고 견고하고 위태롭고 많은 단어의 색을 가졌는지 모릅니다. 나는 파괴될 때 더 아름다웠고, 우리의 사랑은 충분히 병들어 있었다.
……
그는 매일 밤마다 꿈이 자신의 모든 것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그 어떤 것도 모든 것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사랑해. 나는 우리가 굶주림에 지쳐 서로를 뜯어 먹고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앓았다. 나의 한쪽이 무섭게 병들어가고 있었다.
/우리, 조혜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