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 들어온 일본인 남성들이 가장 당혹스럽게 느낀 지점은 조선에는 유가쿠(遊郭) 비슷한 시설이 없다는 사실이었다고. 재조선 일본인 거류민들은 식민지에 홀로 건너온, 남자가 많은 남초 사회였음.
— 협박 당하고 있음)모시풀🌿 (@enamelpaint) April 1, 2023
1876년 일본에 의해 조선이 개항한 직후부터 일본인 유곽업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함. pic.twitter.com/UYEUXCDHeb
재조선 일본인들은 1902년 부산 부평동에 유곽을 정식 설치함. 유곽 설치 전후로 일본인들은 일본인 유녀를 데려와서 여관 및 식당 등지에서 은밀하게 매춘업을 하였음. 유곽 이외 성매매 영업은 일본 권력에 의하여 주로 묵인됨. pic.twitter.com/nnjTuRmFf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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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일본을 방문한 우리나라 외교사절단 일행을 만난 어느 일본 지식인이 함께 유곽에 놀러가 즐기자고 이야기하는데, 조선에는 그런 시설이 없을 뿐더러 그런 데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내용이 실린 필담록도 있다. https://t.co/GuUUBMgwJ2
— REdInt (@desemboltura) April 2, 2023
스에마쓰 : 도쿄(東京)의 사정을 잘 알고 싶다면 한 번 기루에 올라 창녀들이 노래하는 자리와 접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귀하께서는 어떻게 여기시는지요?
— REdInt (@desemboltura) April 2, 2023
김량한 : 흥취와 회포가 매우 졸렬하여, 본디 카가이(花街)의 꽃을 채취할 뜻이 없었습니다. 공公과 더불어 하기를 사양합니다.
유득공이 청에 갔는데 청인이 조선에도 청처럼 남창들이 있냐고 물어본걸보면 청-일본과 조선의 문화가 많이 달랐던것 같아요
— 호이파 (@fdl1668) April 2, 2023
기생제도와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 협박 당하고 있음)모시풀🌿 (@enamelpaint) April 2, 2023
또한 한국 역사상 매춘들이 있겠지만 일본 유곽과 비교는 어렵지 않을까요? 비유로 개인폭행과 도시테러는 둘 다 범죄이나 사회영향력은 다릅니다.
창기는 일본 유녀 법용어라서 익숙한 것입니다. 삼패는 재주없는 기녀들로 1909년 이후 유곽 영향받아 생겼습니다. https://t.co/pjBucdPnFD pic.twitter.com/AYueBljSs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