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만 돌사진이 없다구요? 혹시…차녀세요?"
이진송드라마 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 중 하나는 드라마의 주연인 고등학생 성덕선이 생일이 며칠 차이 나지 않는 대학생 언니 성보라와 생일잔치를 같이 하고 싶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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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 중 하나는 드라마의 주연인 고등학생 성덕선이 생일이 며칠 차이 나지 않는 대학생 언니 성보라와 생일잔치를 같이 하고 싶지 않다며 부모에게 신신당부하는 장면이다. 생일을 앞두고 장녀 보라는 형편이 어려운 부모에게 생일선물로 새 안경을 사달라고 (부탁하지 않고) 당당하게 요구하지만 차녀 덕선이 바라는 것은 단 하나, 생일잔치를 따로 하는 것 뿐이다. 그러나 다음 주 생일, 보라는 새 안경을 쓰고 나타났지만 덕선은 생일 케이크마저 물려 쓰는 처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생일상을 앞두고 덕선은 그간 계란후라이며 닭다리 배식이 언니와 남동생 위주로 이루어지는 등 일상 속에서 차녀로서 받았던 서러움을 토로하며 "나는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 사람이냐"며 폭발해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
이 장면은 언니는 첫째라서, 동생은 막내라서 부모와 친지들에게 특별한 대우를 받지만 태어난 순서로도(둘째), 성별로도(언니에 이은 또 딸) '새로울 것이 없어' 자라는 내내 '뒷전'인 차녀의 처지를 잘 보여준다. 어떤 종류의 가족 서사에서도 가장 중요한 장남, 최근 이 '유교국'에서 맏딸로 사는 어려움을 풀어내며 인기를 얻은 K-장녀 서사와는 달리 어떤 종류의 가족 서사에서도 거의 말해지지 않는 차녀의 서사를 경험 중심으로 풀어낸 에세이 (문학동네·308쪽)에도 덕선의 대사가 인용돼 있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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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이 과정에서 차녀의 독특한 성격적 특성이 형성되고 이를 '차녀성'이라고 일컫는다. 저자는 차녀성을 "중심에 서지 못하고, 항상 순서가 밀리고, 누군가 나를 발견하고 편애해주기를 바라지만 차마 대놓고 요구하지는 못하는, 욕구와 의사가 그다지 중요하게 취급된 적이 없기에 생긴 감각 같은 것. 누군가와 나누지 않아도 되는 온전한 애정을 향한 원초적 갈망과 우선순위에서 끝없이 밀리는 주변부의 경험"으로 정의한다. 저자는 차녀성이 "약자성과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단어이자 개념이다. 차별과 억압까지는 아니더라도, 미묘하게 끊임없이 '밀려나며 생긴 감각을 아우른다"고 덧붙였다.
저자는 차녀성의 주요한 특성 중 하나로 중립을 지키려는 속성, 혹은 중재 능력을 꼽는다. 차녀로서의 힘듦을 토로하다가도 "장녀도 힘들죠", "엄마라고 그러고 싶었겠어요"라며 자기도 모르고 중립을 지키려 하고 '내가 힘들다고 말해도 되는 건가'라며 눈치를 살핀다. 반면 장남이나 장녀가 누구의 눈치도 살피지 않고 가족 내에서 '내가 제일 힘들다'고 말한다. 힘듦을 토로할 때도 첫째가 출생 지위로 인해 평생 누려 온 '중심성'이 발휘된다는 것이다. 차녀의 이러한 특성은 늘 가족 내 권력 흐름을 주시하며 내 자리를 찾으려고 노력한 경험에서 나온다. 저자는 "이것이 바로 차녀로 살아온 세월이 내 몸과 마음에 주입한 죽일 놈의 중립 기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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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태어난 1988년(용띠해)을 비롯해 1990년(말띠해), 1986년(호랑이띠해)은 호랑이, 용, 말띠 여자는 기가 세다는 근거 없는 믿음과 결부돼 여아 낙태가 더욱 거셌다. 86년의 여아 100명당 남아 출생아 수인 출생성비는 111.7명, 88년은 113.2명, 90년은 116.5명이다. '센 여자'인 게 문제면 호랑이와 용보다 왜 말띠해에 이 현상이 더 심했느냐고? '백말띠해에 태어난 여자는 팔자가 드세다'는 근거 없는 속설을 구실로 여아 출생이 더 기피됐기 때문이다. 통계청 자료를 보면 이 해의 출생성비는 1970년부터 최근 통계인 2020년까지 중 가장 높다. 2010년대 이후 완화됐지만 출생성비는 첫째보다 둘째, 특히 셋째에서 더 불균형해지는 경향이 있어, 1990년 첫째 출생성비는 108.5지만 둘째는 117.1, 셋째는 189.9까지 올라간다. 셋째의 경우 여자아이보다 남자아이가 두 배 가까이 태어났다는 의미다.
서른이 되던 해 "여아 선별 임신중단이 기승을 부렸던 1988년에 태어나 여성혐오 범죄에서 살아남아 무사히 서른이 된 서로를 격려하고 축하해주자"며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무작위로 88년생 여성의 신청을 받아 꾸렸던 '88 용띠 파티'를 연 이유를 "우리는 '태어난 것'이 아니라 '살아남았다'는 감각을 공유하기 때문"이라는 저자의 말과 감각에는 과장이 없는 셈이다. 저자는 여아라는 이유로 태어나지 못한 아이들, 그리고 여아를 임신했다는 이유로 임신중단을 종용받은 어머니들이 존재하는 가운데 90년대 언론이 성비 불균형 때문에 "남자 어린이에게 여자 짝꿍이 부족하다는 것을 큰 사회문제라도 되는 양" 다룬 점을 언급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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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진 기자(hjkim@press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