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나라 강희제의 넷째 아들인 옹정제
강희제는 천고일제, 천년에 한번 나온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성군인데
아쉽게도 후계자 문제를 말끔하게 해결하지 못했다.
황태자 폐위 후 여러 황자들이 후계싸움을 했고
강희제의 유서에 후계자로 지명된 사람이 4황자 인전
여기도 살짝 음모론이 있는데 원래 강희제가 14황자를 총애해서
十四 皇子라고 썼는데
인전이 이걸 第四 皇子(제4황자)로 수정해서 찬탈했다는 것

께름칙하게 즉위한 탓인지 아니면 원래 성정이 그런건지
옹정제는 의심 지수가 맥스 스탯을 찍은 황제였고
숙청은 기본적으로 시원하게 진행했으며
그 유명한 문자의 옥을 열어 사상통제 및 권위강화를 노렸다.
그런데 이 의심병이 의외로 국정하는데 긍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황제가 의심이 많았던지라 사소한 일까지 자신이 맡아서 처리했는데
무능한 황제가 이렇게 사사건건 처리하면 나라가 난리가 나겠지만
다행히도 옹정제는 유능한 군주에 속했다.
일례로

중국은 역사상 모든 왕조가 농업을 근본으로 삼았기 때문에
황무지 개간 같은 농지 확대 산업을 장려했다.
당연히 옹정제 시기에도 농지 확대 산업을 장려 했는데...

개간 사업 성과를 보고 받은 옹정제
"이야 여기 지역은 지사가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엄청난 땅의 황무지를 옥토로 개간했네?"

"어휴 이게 다 황상 폐하께서 성정을 베푸시니 아래에서도 힘써 일하는 게지요."

"야. X발 다 필요 없고 감찰어사 보내라."

"예?"

"내가 계산해보니까 이 기간 내에 황무지 개간을 이 정도로 할 수가 없어요. 어?
이건 둘중 하나지. 백성들을 정말게 굴렸거나 아니면 구라거나. 안그래?"

"어...그렇네요. 그럼 어사를 파견하겠습니다."
결국 감찰이 파견되었고
황무지 개간은 구라라는게 밝혀진다.

당연히 해당관리는 요썰리고 저썰리는 형벌을 받았고
이후 감히 거짓보고를 올리는 관리가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광활한 청나라 영토 내의 대소사를 모두 처리하려고 했던 옹정제는
재위 13년 채우고 과로로 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