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범람하는 세계에서
너는 고작
오리발이었어
옷소매의 끝엔 해변이 있어
서툰 세수와 훔친 눈무롤 적셔 놓은
사탕이 녹을 때까지만 출렁이는 해변에서 나는
말라 가지 않는 헤엄을 배워
안간힘을 다해서
/사탕과 해변의 맛, 서윤후
쓰고 싶지 않은 말들을 일기에 적었다 뚜껑 열린 만년필은 금세 말라버렸고 망설였던 흔적이 행간을 메웠다 두 눈을 부릅떴지만 사랑은 보이지 않았다 앓을 만큼 앓아야 병이 낫던 시절이었다
/삼십대의 병력, 이기선
서로의 외로움을 나누어 짐 지지 않겠다고
마음에 자물쇠를 걸고 들어앉은 봄밤
모래바람은 황망하게 불어오고
난분분한 꽃 소식 기다리는 입 매무새들
너는 어딘가 가려 했지
나는 어디에라도 있으려 했지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진 것은 모두 먼지가 되어버려 특별히
어루만진 것들, 대체 얼마나 쓸어야 채색한 유리가 되나
……
너는 어딘가 가려 했지
아무것도 너를 떠올리지 않는 곳으로
혼자서도 유리가 될 수 있는 곳으로
/모래의 행방, 정한아
달의 저편에는 누군가 존재한다고 한다
아무도 그것을 알 수는 없고
대면한 적 없다고 한다
사람이라고 글자를 치면
자꾸 삶이라는 오타가 되는 것
나는 그것을 삶의 뱃속이라고 생각한다
/면면, 이병률
나도 살아있다
우리를 오래 살리는,
권태와 허무보다 더
그냥 막막한 것들,
미안하지만 사랑보다 훨씬 더
무겁기만 무거운 것들이
있는 것이다
/그 젊었던 날의 여름밤, 황인숙
파도는 죽어서도 다시 바다였다
죽을힘을 다해
죽는 연습을 하는 최초의 생명 같았다
/묻다, 오병량
내가 당신을 모르는 것은 아직 내가 나를 모르기 때문이다 슬픈 육체가 육체를 조금씩 밀어내던 창백한 그 여름 당신의 등은 짚어낼 수 없는 비밀로 깊다 꽃은 너무 멀리 피어 서러움은 뿌리 쪽에 가깝다
사랑을 통과한 나는 물 위를 미끄러지듯 달리던 비애 우리는 어렵게 만나고 쉽게 헤어진다 내가 놓아 보낸 계절들 물결로 밀려드는 이별의 질서 나는 당신이라는 한 문장을 쉽게 놓아 보내지 못한다 강물에 손을 담그면 당신의 흰 무릎뼈가 젖어 있다
/이별의 질서, 서안나
새소리가 높다
당신이 그리운 오후,
꾸다만 꿈처럼 홀로 남겨진 오후가 아득하다
잊는 것도 사랑일까
잡은 두 뼘 가물치를 돌려보낸다
당신이 구름이 되었다는 소식
몇 짐이나 될까
물비린내 나는 저 구름의 눈시울은
바람을 타고 오는
수동밭 끝물 참외 향기가 안쓰럽다
하늘에서 우수수 새가 떨어진다
저녁이 온다
울어야겠다
/반음계, 고영민
할말 없어 돌아누워 두 눈을 멀뚱하고 있으면,
내 젖은 몸을 안고
이왕 잘못 살았으면 계속 잘못 사는 방법도 방법이라고
악마 같은 밤이 나를 속인다.
/문득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이, 오규원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이 세상에서 사랑의 위력으로 날고 잇는 모래의 말들아
사랑이 깊고 깊어 내가 있는 곳으로 올라오지 못하는
/사랑의 위력으로, 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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