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들 경악 시킨 통일신라시대 유물
위 유물을 보고 오면 더욱 이해하기 좋음
드라마 선덕여왕의 주인공으로 대중에게 잘 알려진
미실......
이 아니고
덕만..... 즉 선덕여왕. 우리민족 최초의 여왕으로 유명하지만 신라 황금세대 군주 라인업중에 상대적으로 평가가 좋지 않는 군주이기도 하다.
워낙 백제에게 침공을 많이 허용했으며 지증왕부터 진평왕까지, 이후 무열왕과 문무왕 신문왕이라는 역대급 라인의 기나긴 황금시대를 논할 떄 중간에 끼어서 고통을 많이 받은 여왕이다.
선덕여왕은 침공을 많이 받은 만큼 '불심으로 대동단결'.... 하기 위해 역대급 절도 많이 지었는데
대표적으로
신라의 삼보(세가지 보물) 중 두 개가 있는
황룡사의 9층 목탑을 지은 군주이기도 하다.
- 황룡사는 진흥왕 대에 완공되었고, 선덕여왕대에 자장법사의 건의로 여러 불상들을 안치하기 위해 추가로 9층 목탑을 건립했습니다.
(참고로 신라삼보란 황룡사 9층목탑과 인도의 아소카 왕이 띄워보낸 재료들로 완성시켰다는 설화가 있는 장육존상, 진평왕이 옥황상제에게 받았다는 천사옥대이다)
이처럼 불심이 깊은 선덕여왕 지은 유명한 또 다른 절이 있는데
이름 자체가 '향기로운(芬) 임금님(皇)의 절(寺)'이라 선덕여왕의 상징같은 절인
분황사이며 사진의 탑이 바로 분황사 모전석탑으로 원래는 9층인 석탑이었다.
이 분황사 모전석탑에 이 본 글의 핵심인 신라의 외계인 고문한것같은 미세금속가공기술의 비밀을 쥔 열쇠가 있다.
따라서 우선 신라의 삼기팔괴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있다.
신라의 삼기팔괴 즉 3개의 기이한 보물과 8개의 괴이한 장소를 뜻하는데
팔괴는 넘어가기로 하고
삼기(신라삼보와는 별개다)
신라시조 박혁거세의 소유라는 갖다 대면 죽은자도 되살아난다는 '금척'
불면 적이 패주한다는 최고의 버프템 '만파식적'
그리고 선덕여왕이 갖고있다는 솜에 비추면 불이 붙는다는 수정을 깎아 만든 바둑돌 같이 생겼다는 '화주' 이다
그렇다 본문글의 주인공은 바로 '화주' 이다.
솜에 갖다 대면 불이 붙는다. 감이 오는가?
바로 잼민이때 검은 색종이 태우는 것과 똑같다. 즉 오늘날 말하는 볼록렌즈 돋보기다.
이 화주는 전설로만 전해오다가
일제강점기에 분황사 모전석탑을 해체 수리하는 과정에서
전설에서 현실로 출토되고 말았다.
이 유물은 명문이 없기 떄문에 실제로 선덕여왕의 전설의 보물인 화주인지는 확정을 내릴 순 없다.
다만 선덕여왕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분황사의 모전석탑에서 전설 그대로의 모습으로 출토되었기에 화주라고 추축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다만 이게 여왕의 화주가 아니라 한들 상관은 없다.
중요한 것은 신라시대에 이미 광학의 원리를 이해하고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즉
이 선각단화쌍조문금박같은 고대반도체나 다름없는 미세금속가공 기술은 장인이 단순히 맨눈으로 새겨낸게 아니란 것이다.
아마도 이 금속세공장인은 화주와 같은 볼록렌즈 돋보기를 사용해서 마치 외과의가 루페를 차고 수술하듯 저 0.1mm단위의 작업을 했을 것이다.
우리민족에서 현대 대한민국 이전에 최고의 황금기라고 한다면
단연코 삼국통일 이후 200여년간의 통일신라 시대일 것이다.
그 중동의 이슬람 세계에 조차 황금이 많고 개들조차 금목걸이를 차고다니며, 39채의 금입택(건물 전체에 금박을 씌운 주택)이 있고
처마와 처마가 끝없이 붙어있어 비가 내려도 한방울도 안맞고 돌아다닐 수 있으며, 서라벌 내에 초가집은 하나도 없고 일개 백성조차
숯으로 밥을 해먹었던게 200년 황금기의 통일 신라였다. 이슬람상인들이 한번 신라에 들어오면 나가기가 싫고 실제 정착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이 역대급 평화의 시대인 200년간의 통일신라시대였다.
이후 후삼국시대의 전쟁과 혼란과 고려의 몽골침략이후 신라의 찬란한 기술들은 로스트 테크노놀로지가 되고 말았다.
고려가 겨우겨우 보수만 해오던 신라삼보가 두개나 있는 황룡사도 몽골칩입때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의 4배라던 황룡사 대종도 사라지고 말았다.
굉장히 아쉬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긴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Q. 근데 우리나라 전통 가옥들 보면 왜 다 1층으로 구성됨??
조선후기에 소빙하기 닥치기전엔 그래도 2층이상 건물이 많았다네요. 이후에 온돌난방 이외에 2층이나 3층은 단열이 안돼서 살 수가 없는 환경이 옵니다. 그 때 온돌에 쓰느라 온 산의 나무들도 전부 갖다써서 조선 말기 사진보면 민둥산밖에 없습니다.
개들조차 금목걸이를 차고다니며, 39채의 금입택(건물 전체에 금박을 씌운 주택)이 있고 처마와 처마가 끝없이 붙어있어 비가 내려도 한방울도 안맞고 돌아다닐 수 있으며, 서라벌 내에 초가집은 하나도 없고 일개 백성조차 숯으로 밥을 해먹었던게 200년 황금기의 통일 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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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근거 있는 얘기임?
신라의 전성시대에 서울 안 호수가 178,936호(戶)에 1,360방(坊)이요, 주위가 55리(里)였다. 서른다섯 개의 금입택(金入宅)[13]이 있었다.
《삼국유사》 제1 기이 진한
왕이 좌우의 신라들과 함께 월상루(月上樓)에 올라가 사방을 둘러보았는데, 서울 백성의 집들이 서로 이어져 있고 노래와 음악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왕이 시중 민공(敏恭)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지금 민간에서는 기와로 덮고 짚으로 잇지 않으며, 숯으로 밥을 짓고 나무를 쓰지 않는다고 하니 사실인가?"라고 물었다. 민공이 "신도 역시 일찍이 그와 같이 들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헌강왕 6년(880) 9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