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유명한 비석들에 꼭 붙는 드립이
'주민들이 빨랫돌로 썼다더라'이다.
그러니까 비석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 민중이
긴 세월 동안 문화재를 훼손시켰단 것인데...
과연 그럴까? 직접 알아보도록 하자.
또 난가?
빨랫돌 드립이 있는 비석 중 하나는
이전 글에서도 소개드린 충주 고구려비이다.
한겨례를 비롯한 일부 언론들이 이 설을 기사에 실었으며,
블로그 등을 비롯한 글들은 더 많다.
이른바 '마을 사람들이 쓰는 빨랫돌에 글자가 있어요'라고
마을에 시집 온 외지인이 신고했다는 것이다.
헌데 이상한 일이다. 마을 이름이 입석(立石)마을인데
오래 전부터 자빠져 있었다는 말인가?
마을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오래 전
어느 대장간의 벽&기둥과 같은 역할을 했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반대로 말하면 이 시간 동안은
결코 빨래판으로 사용되지 않았음을 뜻하기도 한다.
상식적으로 대장간까지 가서 그 집 기둥에 대고
"예아!!! 빨래 뻑킹 그레이트!!!" 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리하여 찾아볼 수 있는 논리는
1972년 홍수가 일어나 비석이 떠밀려간 후
아낙네들이 물에 잠긴 채 쓰러진 비석을
빨랫돌로 썼다는 것이다.
돌을 다시 세우기 전까지 말이다.
일단 물에 빠졌다가
마을 사람들에 의해 다시 세워진 것 자체는 사실이다.
연구진도 대장간 이야기를 듣고 조사한 결과,
30m 정도 떨어진 곳에 대장간의 흔적이 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지금 고구려비는 원래 있던 대장간 터에 서 있다.
근데 이렇게 보니 또 뭔가 이상하다.
누가 굳이 빨랫돌을 다시 세우겠는가? 뭐 때문에?
정영호 교수는 연구를 시작하기 전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있었다고 전한다.
정순택이라는 마을 아주머니가 기도를 하러 오더라...
아들이 영남대의 졸업반이었다.
시아버지 때부터 3대째 돌에 치성을 드리고,
그 여인도 비석에 기도를 드리자
그 아들을 낳게 되었다고 전해 주었다.
이는 충주 고구려비가 오래 전부터 지역민들에게
영험한 비석으로 간주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런 비석이 한 번 쓰러졌다는 이유만으로
히히 개꿀 하며 대놓고 빨래판으로 쓴다?
정작 그렇게 해 놓고 다시 세워 놓는다?
입석마을 주민들이 단체로 기억상실에,
그것도 두 번이나 걸리지 않은 이상
쉽사리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다.
마을 사람들이 했을 리도 없는 말을
과연 기자들은 어디에서 들었다는 것일까?
이 기사에 따르면 누군가 김예식 씨에게
비석이 빨랫돌로 쓰이고 있다는 전화를 걸었고
김예식 씨가 동호회원들과 확인하러 왔다는데...
그럼 마을이 귀중하게 여기던 비석을
다시 세워 놓고 빨랫돌로 썼다는 건데 그건 그렇다 치고...
또다른 기사에서는 그는 맨 처음 비석을 보러 왔을 때
글씨가 없는 백비인 줄 알았다고 한다.
그럼 상식적으로 위의 근거들과 함께...
그 긴 세월 동안 마모되어 김예식 씨도 못 알아보고
박사들도 싸움 붙게 만든 글씨를
일반인이 '빨랫돌'을 유심히 보고 알아챘다라...
누가 이런 거짓말을 꾸며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자극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사실확인도 없이 그대로 복붙한 언론의 탓이 크다.
이미 루머인 것이 확인되긴 했지만,
그럼 뭐 하나. 기사를 접한 사람들은
정말 마을 사람들이 빨랫돌로 쓴 줄 알고 있는데.
그런가 하면 중앙일보는
2009년 문무왕릉비의 파편이 발견되었을 당시
또다시 집 주인이 파편을
빨랫돌로 쓰고 있었다는 루머를 생산했는데...
정정보도라고 내놓은 것에서 변명을 한답시고
또다시 충주 고구려비가 빨랫돌로 쓰였다는 루머를
사실인 양 담았다. 아주 가지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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