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한 바람 때문인지 셔츠가 멋대로 구겨졌다. 여름휴가가 끝날 무렵이라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잇따라 들렸지만 돗자리를 펴고 앉을 자리는 있었다. 해반정식이 어딘지 아세요? 누군가 내게 길을 물었을 때, 풍경의 일부처럼 보였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졌다.
부서지는 파도를 보면서 그리운 이들을 떠올렸다. 내 친구 여정. 바다를 좋아했던 그녀는 육지를 뒤로한 채 물의 삶을 택했다. 약 삼 년 전, 곱게 갈린 여정의 유골은 이곳에 뿌려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바다가 아닌 모래사장에 버려진 거다. 여정의 가족은 하나의 헤프닝이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늦은 밤까지 이곳을 떠나지 못했다. 사람들이 쌓고 무너뜨리는 모래성에 갇혀 있는 공주가 되었을지도 모르니까.
여정은 모순적인 사람이었다. 친구들의 뻔한 연애에 질린다면서도 노트북을 인생영화로 꼽았다. 왜? 하고 묻자 그냥, 이라고 답한다. 우리의 대화는 늘 이런 식이었다. 여정과의 관계를 지키게 위해 악착같이 노력했다. 스스럼없이 붙어오는 몸짓과 마음이 부담스러웠다. 그녀가 우정 팔찌를 선물했을 때 나는 온몸이 달아오르는 걸 경험했다. 내게 사랑만 남았을 때 나는 여정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만나기 어려울 것 같은 내 말에 여정은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천천히 주억거렸다. 이렇게 끝나도 되는 거니. 한 번쯤 나를 붙잡았으면 바로 잡혀줄 자신이 있었지만, 여정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나는 서른이 넘어서야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이 지구에 뿌리를 내렸다는 생각이 든 건 처음이다. 언젠가 여정은 자신이 행성을 착각해 지구로 온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엉뚱한 거라면 뒤지지 않았던 여정은 기묘한 망상으로 위로를 받는 것 같았다.
어디선가 살아가고 있을 그녀를 생각하며 버틴 날도 많았다. 다시금 내 기반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나는 우정이든 사랑이든 적당히 행복해하고 슬퍼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여정과 비슷한 사람은 만날 수 없을 거라 확신했다. 때때로 사람은 초월적인 슬픔을 느낄 때가 있다고 한다. 내가 느낀 건 절망일까 원망일까 슬픔일까.
나는 여정이 준 감정을 먹고 자란 사람이다. 고아였던 내게 그녀는 가족이자 친구였고 오랜 동반자가 될 거라 예상했다. 눈물과 분노는 내 원동력이 되었고, 기쁨보다는 슬픔이 나를 성장시킬 때가 많았다. 나는 여정의 죽음으로 한층 성숙한 사람이 될까. 철없다며 내 앞머리를 헝클어트리던 그녀의 오랜 계획이었을까.
여정아. 이름대로 살고 싶다는 꿈을 끝내 이뤘구나. 내게 다른 행성에서 온 것 같다는 말을 한 적 있잖아. 행성에는 땅보다는 바다가 많고 사람보다는 동물이 많다고 했었지? 그곳으로 돌아간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말하지 않을게. 다만 기꺼이 네 여정에 함께 해도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