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일본 제국주의의 패망과 함께 한반도는 오랫동안 염원하던 광복을 맞이했다.
한반도는 통일 된 새 나라를 세울 희망으로 가득 차있었고
제2차 세계대전 때 서로 협조적이었던 미국과 소련은 이념 대립으로 인해 갈등이 가득해지고 있었다.
그 갈등은 한반도를 향하고 있었고, 국민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의 선이 그들의 눈에는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광복을 맞이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북위 38도 선을 기준으로 북에는 소련군이, 남에는 미군이 진주했다.
소련은 북한에서 토지개혁과 지주, 자산가의 숙청, 주요 산업 국유화 등을 추진했다.
연합국이 통일국가를 수립 할 방법으로 마련한 미.소 공동위원회는 좌,우의 대립 끝에 결렬되었다.
북한은 공산당 주도 아래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등을 거쳐 정부 수립이 추진됐고
남한에서는 UN 결의에 따른 총선을 통해 정부 수립이 추진됐다.
1948년 8월과 9월, 결국 한반도에는 북위 38도 선을 기준으로 남쪽의 자유민주주의와 북쪽의 공산주의 두 체제가 들어섰다.
1,000여 년 넘게 통일국가를 유지했던 민족에게 굉장히 이례적인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북한은 일제강점기 때 지은 거대한 중공업 지대를 확보하고, 일찌감치 1당 독재체제를 구축하여 김일성 정권은 남한 공산화를 위한 무력침공의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소련이 북한의 남한 공산화 계획을 강력히 지지했을 때, 남한 이승만 정부는 새 국가의 기틀을 다지는 것만으로도 벅차 북진통일 주장은 단순히 구호에 그쳤다.
김일성은 북한 정권 수립부터 무력 '남침'을 꾀했고, 1949년 신년사에서 '국토 완정' 이라는 단어를 무려 13회나 사용하면서 무력'남침'의 의지를 강하게 드러냈다.
1949년 3월, 김일성은 소련을 방문하여 무력 '남침'을 말했으나 스탈린은 아직 북한의 전력이 압도적이지 않다고 하여 더 철저한 계획을 독려했다.
스탈린은 북한에 소총 15,000정, 각종 포 139문, T-34 전차 87대, 항공기 94대 등 많은 양의 무기를 지원하며 '남침' 전쟁을 중국과도 협의하라고 지시했다.
1949년 4월 말, 북한 대표가 중국을 방문하여 스탈린과의 협의 결과를 알리자 마오쩌둥도 전쟁을 유보할 것을 권했고, '남침' 준비차 중국 인민 해방군 내 조선인 2개 사단을 넘겨줬다.
1949년 6월, 미군이 남한에서 철수하자 김일성은 8월에 다시 스탈린에게 '남침'을 허락받고자 했지만 스탈린은 여전히 전면전은 시기 상조라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1부 끝
2부에서 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