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안 = 홍종선 대중문화전문기자] 모든 영화는 끝을 향해 달리는 열차다. 많은 영화가 세상에 내놓고 싶었던, 스크린 위에 펼치고 싶었던 명장면 하나를 위해 2시간 러닝타임을 채우기도 한다.
배우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모든 배우가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넣은 순도 100%의 명장면을 영화 안에 남기진 못한다. 배우의 준비가 부족했을 수도 있고, 배우는 온전히 표현했는데 감독과 작품이 받아 안지 못했을 수도 있다.
영화 ‘박하사탕’에서 배우 설경구가 보여준 “나 다시 돌아갈래~”는 개봉한 지 24년이 지난 현재까지 회자되는 명연기, 명장면이다. 2000년에 태어나지도 않았던 젊은 관객들이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의 1893년작 ‘절규’를 연상시키는 설경구의 처절한 표정과 두 팔 벌려 뒤로 젖힌 몸짓 하나에 마음이 동해 영화를 찾아볼 정도다.
오래도록 뇌리에 남을, 뜨겁고도 복잡 미묘한 표정을 최근 목격했다. 영화 ‘범죄도시4’(감독 허명행, 제작 빅펀치픽쳐스‧홍필름‧BA엔터테인먼트, 배급 에이비오엔터테인먼트‧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빌런 백창기를 연기한 배우 김무열의 연기, 최후의 모습에서다. 패배를 받아들이면서도 이것이 진정 지금 내가 마주한 현실인가 믿기지 않는 기막힘, 분루가 눈가에 치솟으면서도 입가에선 허탈의 웃음이 터져 나오는 얼굴과 웃음소리. 오만가지 감정이 뜨겁게 뒤엉킨 표정이 스틸컷처럼 가슴에 박혔다.
선하디선한 주인공이 보여준 표정이었다면 달랐을 것이다. 눈 하나 끔뻑하지 않고, 단검 하나로 급소를 슈슈숙 찔러 상대의 목숨을 거두는 악당. 손이 아니라 팔의 온 근육을 다해 찔러 넣은 것으로도 모자라, 발이 아니라 다리로 전력을 다해 걷어차 흉기를 깊숙이 박아넣는 잔인함을 지닌 빌런. 영화 내내 말수 적고 웃음기조차 없었던 악인이 갑자기 피범벅 눈물에 파안대소를 겹으로 보여주니 어리둥절하다 못해 어질어질하다. 어떤 뜻이 담긴 표정이었을까를 자꾸만 생각하게 하는, 복잡다단한 감정의 파노라마가 짧은 순간에 응축돼 폭발하니 매우 인상적이다.
짧은 장면인데 마치 스크린에서 돌출돼 튀어나오는 듯한 강렬함을 안기는 이유가 더 있다. 배우 마동석, 그가 연기한 마석도의 매운 주먹이 주는 시원한 타격감을 주된 무기로 한 대중 액션 영화에서 만나리라 예상하지 못했던 깊이의 감정 연기여서다. 영화 ‘아수라’나 ‘신세계’ 같은 누아르 영화에서 만날 것 같은 감성을 유쾌 통쾌 액션 무비에서 마주하니 그 예외성에 짜릿함이 두 배다.
필리핀에서 들어와 원하는 것을 다 얻고 한국을 떠나려는 그때, 백창기를 이대로 보낼 수 없는 마석도와 비행기 1등석 구역에서 벌이는 대혈투. 여기까지는 그동안 보여온 백창기의 차분하면서도 인정사정없고, 누구에게도 진 적 없어 자신감 넘치는 모습 그대로다. 그러나 최후의 장면에서 페이소스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쓰러지는 모습은 그동안의 백창기와매 무척 대조적이다.
배우 김무열은 매우 영민하다. 마지막 단 한 번의 이지러짐, 어긋남, 벗어남이 더욱 강렬해 보일 수 있도록 또 단 한 번의 웃음이 뜨겁고 또렷하게 들릴 수 있도록 2시간 가까운 러닝타임을 채우는 나머지 백창기의 모습을 차가운 냉혈한으로 인내심 있게 연기했다. 가끔 하는 말도 나직이, 얼굴은 고무 마스크를 쓴 듯 경직되게, 주위를 살펴도 눈동자만 움직였다. 그가 빠르게, 날래게 움직이는 순간은 오직 핏빛 혈투를 벌일 때만이었다.
덕분에 마지막 모습은 마치, 내내 파란색이던 백창기가 시뻘겋게 폭발하는 것처럼 인식된다. 그 뜨거운 폭발, 눈알을 감싼 물기가 투명한 눈물이 아니라 빨간 피로 보이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폭발과 함께 스러졌다.
대조 효과에 대해 한 가지 더 추가하자면. 한 작품 안에서 감성 연기만 깊이 있게 해도 멋있는데, 스턴트맨을 방불케 하는 프로 액션배우의 면모를 보이며 김무열이 얼마나 몸을 잘 쓴 배우이고 얼마나 준비된 몸을 지녔는지 내내 과시하다가 ‘갑자기’ 감성 고수의 연기를 꺼내 보이니 더욱 인상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진한 감성 연기 한 장면을 향해 배우 김무열은 액션 대가의 모습으로 달린 것이다.
‘범죄도시’ 시리즈 전편의 무술감독이자 4편의 연출을 맡은 허명행 감독은 2일 데일리안에 ‘준비된 액션배우’ 김무열에 대해 극찬했다. 허 감독은 특수용병 출신 백창기의 액션을 구상함에 있어 필리핀 전통 무술 칼리를 기본으로 두고 있었는데 ‘거짓말처럼’ 칼리를 오래도록 연마해 온 배우 김무열이 캐스팅된 것은 ‘우연이라기엔 운명’이라고 말했다.
“백창기가 구사하는 무술은 칼리가 기본이에요, 김무열 배우도 칼리를 연마해 왔고요. 알고 캐스팅한 건 아니고, ‘액션 잘한다’ 소리만 들어왔는데, 백창기 역으로 만나보니 칼리를 하셨다고 해서 제게는 너무 반가운 소식이었죠. 우연의 일치인데, 그렇게만 보기엔 정말 거짓말처럼 딱! 백창기를 김무열이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거죠! 덕분에 칼리, 아르니스 이런 쪽 무술을 기본으로 한 백창기의 액션을 화면에 구현해내기가 되게 수월했어요. 워낙 다양한 무술을 연마해 온 김무열 배우 덕에 날랜 백창기를 만드는 데 용이했습니다.”
배우 김무열이 어떤 무술들을 연마했는지, 그것이 영화에 적용된 바 있는지를 묻자 허명행 감독은 백창기의 움직이는 속도와 화려한 발차기 동작의 바탕이 되었다며 특정한 무술을 추가하지는 않았다고 설명했다.
“김무열 배우가 실제로 되게 많은 무술을 연마해 왔는데 칼리를 기본으로 카포에라(무술 수련을 금지 당한 브라질 흑인들이 춤을 활용해 고안한 무술문화. 발기술이 대부분을 차지하며, 회전과 덤블링을 이용한 화려하고 빠른 속도의 동작이 특징) 등 여러 가지를 해왔더라고요. 그렇다고 제가 백창기에 (김무열이 능한) 카포에라를 접목시킨 건 아니지만, 무열 씨가 무술 연마를 오래 해서 기본적으로 몸이 날래다 보니 욕심내 추가할 수 있는 동작들은 있었어요. 일테면 칼리에 플라잉 니킥이라든지 아크로바틱 동작을 추가로 넣었습니다. 칼리만 구사하면 단조로울 수 있어서 백창기가 빠르다, 날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장면과 동작을 추가하고 섞은 것이죠.”
“플라잉 니킥은 무릎으로 상대를 가격하는 것인데, 김무열 배우가 지닌 액션 능력이 워낙 좋기 때문에 화려한 기술을 추가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4편을 위해, 차별화 전략으로 굉장히 애착을 지니고 만든 캐릭터가 백창기인데 김무열 배우가 너무나 잘해 줘서 대만족합니다!”
연출 감독의 만족은 흥행으로 이어지고 있다. 개봉 9일 만에 관객 600만 명을 넘어섰고, 이번 주말엔 800만 돌파를 노린다. ‘범죄도시’ 시리즈 최고의 전투력을 보이는 백창기, 실제로 최고의 액션 능력과 무술의 기본기를 갖춘 김무열만 잘해서가 아니다.
시리즈를 책임지고 이끄는 주먹왕 마석도 역의 마동석, 영화 ‘범죄도시’의 장르를 코미디로 바꿀 만큼 큰 웃음 주는 장이수 역의 배우 박지환, 안정된 연기력으로 비호감 ‘찡찡 투덜이’ 캐릭터 장동철을 맛있게 소화한 이동휘, 마석도의 든든한 오른팔 브라더로 성장한 김만재 역의 김민재와 가족 같은 광수대 형사 양종수와 정다윗 역의 배우 이지훈과 김도건, 새로이 등장한 똘망똘망 사이버수사대 형사 한지수 역의 이주빈, 그리고 백창기와 콤비를 이뤄 절도 있고 파괴력 큰 육탄액션을 선보인 조 부장 역의 김지훈 등 많은 배우가 물 샐 틈 없이 제 몫을 해낸 결과다. 이번에도 천만영화에 등극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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