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아파 눈물을 흘리는 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우정보다는 사랑이 우선이었던 현은, 나를 감정 쓰레기통쯤으로 여겼다. 쓰레기가 되어 돌아온 그녀의 감정을 분리수거하는 건 내 전문이었다.
우정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할 수 있는 건 무엇이든 했다. 연애와 거리가 멀었던 나는 현을 통해 사랑을 배웠다. 만나는 사람마다 각각의 운명론을 만들어내는 그녀가 퍽 귀여워 웃음이 났다. 현은 자신의 사랑스러움을 알아줄 남자를 만나지 못한 것 같다. 아니면 현이 내 앞에서만 사랑스러운 짓을 하는 걸까.
나는 그녀가 좋아하는 사람과 있을 때 어떤 모습이 되는지 알지 못한다. 자신의 얼굴에서 가장 좋아하는 보조개를 보이며, 고개를 25도 기울인 채 예쁘게 웃어 보일 것이다. 현은 연애에 관해서는 의견이 확실한 사람이었다. 그중 하나는 커플 반지를 맞추지 않는다는 거였다. 하지만 나와의 우정반지는 변색이 될 때까지 끼고 다니는 모순적인 애였다.
나는 묻고 싶었다. 네가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범주에 내가 들어갈 수 있는지 말이다. 현을 짝사랑했을 당시에 구내염 때문에 고생한 날이 많았다.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해 생긴, 일시적인 현상이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지병을 앓던 할머니가 곧 돌아가실 것 같다며 엄마가 운다. 어린 아이처럼 우는 엄마를 달랬다. 내가 엄마의 엄마가 된 것 같은 기묘한 느낌이었다. 언젠가 엄마와 딸의 역할이 바뀌게 되는 시점이 온다. 그 시점을 경험하기엔 이른 시기였다. 그 뒤틀림은 남동생이 아닌 나만이 겪어야 하는 일이었다. 나는 친구 같은 엄마를 원했지, 자식 같은 엄마를 원한 건 아니었다.
엄마는 집안일에 손을 놓았고 밤마다 할머니를 찾다가 잠에 들었다. 그렇게 집안은 점점 기울어졌고 장녀답게 나는 가족의 장이 되었다. 남자가 가장이 되었을 때는 어느 부족의 우두머리가 된다. 그런데 왜 여자가 가장이 되면, 멸망한 도시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가 되는 걸까.
나는 풋풋한 첫사랑을 하는 소녀가 되고 싶었다. 또래만큼 순진하고 대담한 학생이고 싶었지만, 우리 집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는 나뿐이었다.
나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현이 다니는 독서실과 가까운 편의점에서 일을 시작했다.현은 매일 같은 커피 두 개를 사갔다. 독서실에서 누군가와 썸을 타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원 플러스 원이라고 거짓말을 하며 반값만 받았다. 이렇게라도 마음을 표현하지 않으면 숨이 멎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언젠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현과 누군가가 입 맞추는 걸 본 적이 있다. 나는 상대가 남자이길 바랐다. 우리가 이어질 수 없는 이유가 단지 성별이었으면 했다. 그들은 같은 패턴의 교복 치마를 입고 있었다.
'걔가 너 좋아하는 것 같아.' 상대의 말에 현은 알고 있다는 듯이 웃어 보인다. 나는 그녀의 마음이, 우정이 아니었다는 걸 안다. 비 오는 날 교복이 다 젖을 때까지 주차장 구석에서 서로를 안고 있던 게 꿈은 아니었으니까. 그녀는 무너져가는 내 세계의 첫 방문자가 되고 싶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지하야. 이거 원 플러스 원 맞지?"
"어. 아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