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스틴 파샤누는 자신의 동성애를 공개적으로 고백한 최초의 축구선수이자 비극으로 인생을 마감한 사람이었다. 그의 인생은 끔찍한 결말을 맞이했다. 다른 측면에서 보았을 땐, 축구는 충분히 발전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이 사실은 충격적이다. 다른 직업에서는 성적 취향에 대해 누구에게도 묻고 따지지 않는다. 성적 취향은 발달에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21세기에도 금기시되는 주제에 직면해 있으며, 이는 놀랍게도 계속되고 있다.
저스틴 파샤누는 누구였나?
그는 80~90년대의 영국 축구선수였다. 1961년 2월 19일에 태어난 그는 영국, 미국, 캐나다, 뉴질랜드, 심지어 스웨덴까지 다양한 팀에서 뛰었다. 하지만 그렇게 유명한 선수는 아니었다.
노리치에서 커리어를 시작한 어린 모습의 파샤누
1981년, 그는 당시 유럽의 챔피언이었던 노팅엄 포레스트와 £1m의 이적료로 계약했다. 그는 흑인 선수 최초로 백만 파운드의 이적료를 올렸다.
그러나 노팅엄 시절은 좋지 못했다. 그는 당시 감독 브라이언 클러프와 충돌이 있었다.
클러프는 자신의 전기에서, 파샤누와의 대화를 들려주었다...
ㅎㅎ... 빵 한 조각을 먹고 싶으면 어디로 가야 할까?
? 빵집 가야지
양고기 먹으려면 그럼 어디로 가야 될까?
정육점 가야죠 당연히
그럼 그 빌어먹을 게이 클럽은 도대체 왜 가는 거냐???
‘저스틴 파샤누가 게이바를 드나든다’라는 소문이 노팅엄 지역의 타블로이드 언론에 의해 알려졌고, 클러프는 그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며 그는 노팅엄 생활을 접어야 했다.
그러다 1990년, 그는 더 선과의 독점 인터뷰에서 공개적으로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밝혔다. 커밍아웃을 한 최초의 프로 축구선수가 된 것이다. 1990년 10월 22일 자 The Sun의 헤드라인: '1백만 파운드의 축구 스타: 나는 게이입니다'.
당시 더 선의 보도: 이 인터뷰에는 압박이 있었다는 것이 나중에야 밝혀졌다.
이 고백으로 인해 그의 커리어는 브레이크 없이 급속도로 내리막에 빠졌다.
그 이후로 그의 커리어는 곤두박질을 쳤다. 사람들은 그의 성적 취향을 조롱하며 그에게 모든 시선을 쏘아보냈다. 그의 팀원들 중 상당수는 축구계에서 게이는 설자리가 없다고 말하면서 그와의 관계를 끊었다. 축구선수이기도 했던 그의 친동생조차 The Vocie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그를 강하게 비난했다. "나는 언론에서 파샤누라는 성이 동성애와 연관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것이 나라고 생각할 것이다."
(당시 신문의 제목: '존 파샤누, 내 게이 형제는 버려진 자식이다.')
그의 일상생활은 불가능해졌다. 동성애자 국회의원과의 성관계 의혹, 스캔들 등에 대한 루머와 소문이 나왔다. 또한, 그의 선수 커리어는 많은 팀과 코치들이 그에게 기회를 주길 거부할 정도로 무너지고 있었다. 그는 허리케인 속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그의 삶은 90년대 후반 비극적으로 끝났다.
결국 그는 이적과 동시에 세계를 떠돌며 커리어를 마감했다. 그는 1997년 미국에서 은퇴했다.
그러다 1998년 3월 25일, 한 17세 소년이 저스틴 파샤누와 함께 하룻밤 술을 마신 뒤 그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미국 경찰에게 신고를 했다. 파샤누는 4월 3일 경찰 조사를 받았지만 구속되지는 않았다.
이후 그는 나중에 영국으로 돌아갔지만, 1998년 5월 3일 런던 쇼디치의 버려진 차고에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되었다. 옆에는 한 노트가 있었다: "재판이 시작되기도 전에 나는 이미 유죄 판결을 받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나는 그 청년을 학대한 적이 없어요. 그렇다. 우리는 성관계를 가졌지만 상호 합의에 따라 성관계를 가졌다. 다음날 아침 그는 나에게 돈을 요구했고 내가 그에게 No라고 말했을 때, 그는 '두고 보자'라고 대답했다. 더 이상 내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사랑하는 예수님께서 저를 반겨주시고 마침내 평화를 찾을 수 있길 바랍니다."
매우 음울하고 다소 이상한 사건 속에 경찰은 이 사건을 자살로 분류하였고, 최초로 동성애를 고백한 축구선수 저스틴 파샤누의 이야기는 그렇게 끝이 났다. 그의 조카이기도 한 아말 파샤뉴는 스포츠 속에 대한 편견을 없애고 동성애 혐오증을 해결하기 위해 저스틴 파샤누 재단을 설립하기도 했었다.
그러고 2013년, 당시 리즈의 선수였던 로저스는 자신의 길을 따르기로 결심하고 벽장 속에서 나오면서 커밍아웃을 하였다.
또 2014년 초, 독일의 토마스 히츨슈페르거가 자신의 성향을 고백하면서, 게이 커밍아웃은 파샤누가 마지막이 아니었다. 커밍아웃, 다른 삶의 영역에서는 무관하지만 축구와 같은 세계에서는 거의 필멸의 죄를 짓는 것이다.
https://colgadosporelfutbol.com/justin-fashanu-el-primer-jugador-que-confeso-ser-homosexual/
잉글랜드 국가대표이자 블랙번의 1994-95 프리미어리그 우승 주역이었던 풀백 그레엄 르소는 딸을 둔 유부남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커리어 내내 동성애자라는 악성 루머에 시달리며 상대팀 선수들과 서포터들의 괴롭힘을 받았는데, 리버풀과의 경기 도중 스트라이커 로비 파울러가 그를 향해 엉덩이를 내밀며 신경전을 벌인 일화가 유명함.
https://i.dailymail.co.uk/i/pix/2014/01/11/article-2537868-0017991800000258-255_634x437.jpg
http://news.bbc.co.uk/2/hi/sport/football/fa_carling_premiership/289853.stm
이후 파울러는 FA에 기소되었으나 결국 아무런 징계도 받지 않았으며,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르소에게 사과 한 마디 하지 않다가 훗날 히츨스페르거의 커밍아웃으로 이 사건이 재조명되자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시인함.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호모포비아가 축구계는 물론 사회 전반에 만연한 시절이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