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 남성이 인터뷰한 것 같아요.
글 밑, 사진 위에 저자에 대해 나와 있습니다.
위안부할머니들에게 강제로 인육을 먹인 일본
위안소에서 탈출하시다 잡혀 온몸에 문신을 당한 정옥순 할머니.....(사진有)
일본이 행한 식민지 지배로부터 커다란 피해를 받은 한국인들은 일본 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에 살고 있는 피해자들에 대해서는 국제사회에 그 실태조차 거의 알려진 바 없다.
나는 올해 5월에서 6월에 걸쳐 평양에 19일간 체류하면서 많은 피해자들을 취재했다. 그중에서도 일본군에 의해 성노예가 된 전 일본군 위안부 여성들의 증언과 그들의 몸에 깊이 새겨진 상흔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19일간 평양에 머물면서 내가 바라던 바를 거의 다 취재할 수 있었다. 전 일본군 위안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피폭된 사람, 강제연행돼 중노동에 종사한 사람, 징병으로 군인이나 군속이 된 사람, 불교도로서 탄압받은 사람까지 모두 21명을 만났다. (중략.....)
임신하자 낙태시킨다고 자궁 들어내 북한에서 전 일본군 위안부들을 취재하는 것은 일본인으로서, 더욱이 남성으로서는 매우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그들은 마음의 상처뿐만 아니라 똑바로 쳐다볼 수 없을 정도의 끔찍한 육체적 상처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것은 민족차별과 여성차별 위에 일본군이 만들어낸 종군위안부 제도의 본질을 보여주는 명확한 증거이기도 하다. 등의 칼자국을 보여준 분은 버마에 연행됐던 정송명(鄭松明, 1924년생)씨. “조선인 여성 400명 중 절반이 싱가포르에서 하선하고 나머지는 랑군으로 갔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한달이나 걸려 타이까지 걸어왔습니다. 위안부 45명과 남성 15명의 조선인이 2척의 배를 타고 귀국했습니다.” 그의 등에는 지금도 선명한 상처가 두곳 남아 있다. “너무 피로해 더이상 상대 못하겠다고 하자 마에다 중위가 일본도를 뽑아 내리쳤습니다. 심한 상처인데도 약 한번 발라주지 않아 2년간이나 상처가 아물지 않았습니다.”
유선옥씨의 배에는 배꼽 위쪽에서 아래쪽까지 크고 오래된 상처가 있었다. 군의관이 자궁째 태아를 들어낸 수술의 흔적이란다. 유씨는 1923년 함경북도 경흥군에서 태어났다. 기장밥을 끼니로 할 정도의 빈농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미야모토가 공장의 일자리 이야기를 해주었고, 그는 따라나섰다. 다른 여성 2명과 함께 끌려간 곳은 중국 동북지방의 목단강. 따라온 걸 후회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다케코라는 이름이 붙여진 그는 처음에 하루 5∼6명 정도, 많을 때는 15명의 군인을 상대해야 했다. 기절했다 겨우 정신을 차리면 다시 군인들이 덮쳐왔다. 불행히도 임신하게 되자 낙태 겸 재임신 방지를 위해 태아가 있는 자궁을 들어냈다. 상처가 낫자마자 다시 군인들을 상대해야 했다. “반항하면 죽여버립니다. 미쓰코라고 불리던 소녀는 목을 쳐 죽였습니다. 여기에 있었던 15명 정도의 여성 중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5∼6명 정도였습니다. 조국이 해방된 뒤에도 거지 같은 유랑생활을 하다가 1948년 10월에 고향에 돌아왔습니다. 1981년에 사망한 남편에게도 제 체험을 끝까지 고백하지 않았습니다”하고 속삭이듯 낮은 소리로 이야기했다. “지금도 몸서리치는 증오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게 한 일본에 대해 복수하는 일에만 골몰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때의 군인을 찾아낸다면 찔러죽이고 싶어요”하고 말하고 그때부터는 내 질문에 거의 대답하지 않았다.
일본인과는 만나고 싶지도 않다는 기분을 뚜렷이 읽을 수 있었다. 이경생(李京生, 1917년생)씨의 배에도 유씨와 비슷한 상처가 있었다. 지주집에서 일하고 있던 이씨는 끈으로 묶인 채 경상남도 창원의 군수공장으로 끌려갔다. ‘천황폐하를 위해 몸을 바치면 좋은 대우를 받는다’고 장교가 말했다. 하루 밤에 10∼15명의 군인을 상대해야 했다. 그리고 임신. ‘아직 쓸 만한데’하는 생각에 자궁째 태아를 들어냈다.“일본 때문에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혼자 있을 땐 옛 생각이 떠올라 눈물이 납니다. 여성을 성욕처리의 도구로밖에 보지 않고 낙태와 불임시술로 자궁까지 들어내는 행위는 여성의 존엄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으로 결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산 사람 삶아 강제로 먹이기도… 정옥순(鄭玉順)씨의 기억은 매우 또렷했다. 그는 함경남도 풍산군 파발리(豊山郡 把撥里)에서 1920년 12월28일 태어났다. 1933년 6월3일 우물에서 물을 긷다가 제복을 입은 남자 3명에게 연행됐고, 끌려간 파발리 주재소에서 강간당했다. 저항하다가 눈을 세게 얻어맞아 이때부터 왼쪽눈이 차츰 안 보이게 됐다. 그뒤 10일이 지나 7∼8명의 군인에 의해 트럭에 실려 혜산(惠山)에 있던 일본군 수비대에 연행됐다. 그곳에는 각지에서 끌려온 여성들이 많이 있었다. 정씨는 하루에 약 40명이나 되는 군인을 상대한 일도 있어 자궁출혈이 심했다.
글·사진/ 이토 다카시(伊藤孝司) 1952년생. 포토저널리스트로 과거에 일본이 행한 식민지지배와 침략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아시아 각국의 사람들, 그리고 현재 일본이 저지르는 지구환경파괴 현황을 아시아 각지에서 널리 취재하고 있다. 아시아의 피해자에 관한 저서를 일본에서 8권, 한국에서 3권(눈빛출판사에서 등), 환경에 관한 저서를 일본에서 2권 출판했다. 일본, 미국, 유럽에서 수십차례의 사진전을 열었으며 96년에는 서울과 부산에서도 사진전 ‘깨어진 침묵- 아시아의 종군위안부들’을 열었다. 일본 우익들의 테러 위험에 대한 본인의 우려에 따라 얼굴 사진을 싣지 않는다.
몇번의 무산끝에 열린 도쿄 위안부 사진전에 걸린 사진들...
이
이들이 있는곳은 한국이 아닌 중국. 쓸쓸하고 가난하게 살아가며
고국을 찾지 못한채 현장의 이슬로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할머니들은 척박한 땅에 뿌리를 내리고 홀로서기라는 사투가 시작된 지 70여년의 세월이 흘렀
다. 낯선 이국의 비바람 속에서 주어진 환경을 극복하는 한 맺힌 생명력만을 가질 뿐이다.
-포토그래퍼 안세홍 작가-
*바른 명칭 알고 가기*
정신대(X)
위안부(X)
종군위안부(X)
일본군위안부(O)
국제 기구나 영어권에서는
Military Sexual Slavery by Japan, 즉
'일본에 의한 성노예'라고 표기한답니다.
이런 건 뉴라이트 성향의 교학사 교과서나 틀려먹는 거니 우리는 올바르게 씁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