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의거를 일으킨 후 이야기
1909년 10월 26일
당시 30대 초반이었던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쏘고 현장에서 잡힘
이때 바로 체포됐다고 하는데
자신을 살인을 저지른 범죄자가 아니라
국제법에 맞게 포로로 대우해달라고 요구
실제로 당시 국제법에도
포로 대우에 대한 조항이 있었음
그리고 1908년에도
전명운 의사와 장인환 의사가
친일파 외교관 스티븐스를 저격했다가
한 분은 무죄 판결 되고
한 분은 감형 받은 전례가 있었음
국제법을 따른다면 안중근도
전명운 장인환처럼 풀려날 수 있었을 텐데
여기서 잠깐, 사건이 발생한 하얼빈은 중국이지만
당시에는 러시아의 조차지였음
주권이 러시아라 재판도 러시아에서 하는 게 맞음
하지만 하얼빈 의거 소식이
미국이랑 유럽 언론까지 다 퍼지고
러시아 입장에서는 부담스럽고 불편했는지
개입하지 않으려고 함...
결국 일본은 세계적으로 처맞다가
중국 뤼순 감옥으로 보냄
그런데 왜 중국이냐면
일본 사법제도는 판사 만장일치가 원칙
사형 선고도 전원이 찬성해야 함..
반대로 중국은 판사 1명이 판결을 담당해서
그 사람이 사형 선고 내리면 바로 사형인 거
전세계 언론이 안중근을 영웅이라고 하고
이토 히로부미는 파렴치한 독재자라고 평가하니
꼴받은 일본은 일반 살인죄 적용해서 사형 때림
그렇게 1910년 2월14일 안중근 사형선고
우리가 알고 있는 발렌타인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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